소액대출 받아 과일가게로 재기 … 이준용씨의 ‘첫 열매 나눔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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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에 써 주십시오.”

서울 강남구청의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 지원대상자로 뽑혀 일원동에 과일가게를 낸 이준용씨 부부. 그는 매일 첫 손님에게서 받은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첫 열매 나눔운동’을 제안했다. [오종택 기자]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이준용(47)씨가 최근 서울 충무로 사회연대은행을 찾아 31만7700원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매일 첫 손님에게서 받은 돈을 한 달 동안 모은 것이다. 이씨는 “영세 상인도 뜻만 있으면 참여할 수 있다”며 ‘첫 열매 나눔운동’에 많은 사람이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사회연대은행은 이씨의 뜻을 받아들여 ‘첫 열매 나눔통장’으로 이름 붙여 돈을 적립했다.

이씨가 나눔운동에 나선 것은 강남구의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 첫 지원 대상자로 뽑혀 무담보로 5000만원을 대출받아 창업에 성공한 것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서다. 그는 5000만원에 친지들로부터 빌린 돈 2500만원을 보태 강남구 일원동 영희초등학교 정문 앞 면적 30㎡의 가게에 세들었다. 개업 1년이 넘은 지금 하루 손님은 400명, 월매출액이 5000만원을 넘을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이씨는 2년 전만 해도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노점상과 가락시장의 청과 도매업체 직원을 거쳐 백화점에서 일하던 2005년, 갑작스럽게 실직했다. 수없이 많은 회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뇌출혈로 쓰러진 장모의 병 수발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 셋을 키우느라 빚은 늘어 갔다.

그러던 중 2008년 9월, 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창업 지원 대상자로 선정됐다. 창업을 준비하기 위해 점찍어 둔 가게 앞에서 10일을 ‘잠복’했다. “시간대별 유동 인구와 동선을 철저히 분석했죠.” 을지로 인력 시장에 나가 인부를 수소문해 직접 가게를 꾸몄다.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해 12월 9일 창업한 이후 부부는 하루도 쉬지 않았다. 오전 3시에 가락시장 경매에 참여한 뒤 오전 9시에 가게 문을 열고 자정에 닫았다.

대형 마트 때문에 영세 상인이 힘든 상황에서 이씨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그는 과일을 잘 아는 게 첫째 조건이라고 말한다. “석류가 왜 좋은지, 토마토가 어떻게 암세포를 억제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거죠.”

믿음과 정성도 중요하다. “과일이 들어온 날짜를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해 줍니다.” 귤 한 상자에 썩은 귤이 한 개만 있어도 한 상자를 통째로 건넸다. 이씨는 “집사람 헤어스타일 바뀐 건 몰라도 단골손님의 머리 모양이 바뀐 건 알아본다”며 웃는다. 고객의 자녀 이름은 기본이고 강아지 이름까지 줄줄 외운다. 가게 앞 초등학교 아이들을 위해 하교 시간에 교통 정리도 한다.

그에겐 아직도 갚을 빚이 많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도 벅차다. 하지만 앞이 막막할 때 받았던 도움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첫 열매 나눔운동’을 생각했다. 아직까지 참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이크로크레디트의 도움을 받았던 몇몇이 “함께해 보자”는 의사를 전달해 온 정도다. 하지만 풀빵 장사도, 자장면 가게도, 미용실 주인도 부담 없이 나설 것으로 믿는다.

글=임주리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마이크로크레디트=신용도가 낮은 저소득층이 창업할 수 있도록 보증이나 담보 없이 소액의 자금을 낮은 이자로 빌려 주는 제도. 1976년 방글라데시에서 무함마드 유누스가 그라민은행을 설립하며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는 99년 민간 단체가 시작했고, 2005년 보건복지부가 ‘희망키움뱅크’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이다. 기초자치단체 중에는 강남구가 2008년 처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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