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그림 한점 살수 있었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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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수요일 퇴근길 인사동 골목, 전시회가 새로 열리는 날이라 화랑엔 공짜술에, 떡에, 푸근한 인심과 함께 멋쟁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분 좋다.

거기에다 공짜 그림구경까지. 한데 난 언제부터인가 그림값은 아예 묻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다. 욕심을 내본들 내 분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비싸다는 표현은 안하기로 하겠다.

혼신의 힘을 다한 필생의 역작에 결례될까 봐서다. 욕심은 나고 살 형편은 못되니 은근히 화가 난다.

내 분수라고 했지만 나 같은 월급쟁이도 아껴 모아 일년에 그림 한 점쯤 살 수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이건 과분한 욕심이 아니다. 소위 소장가의 손에 넘어가 값이 뛰기만을 기다리며 창고에서 썩느니 보다.

저런 그림이 국제시장에선 얼마나 갈까□ 국제경쟁력이라도 갖추고 있는 걸까□ 홧김에 별 악담이 다 나온다.

하지만 외국시장을 둘러보면 솔직히 걱정이다. 얼마 전 어느 문화인 모임 경매에서 소련 작품을 20만원에 샀는데 볼수록 마음에 든다.

해서 나는 전시장을 둘러보며 "어느 걸 훔칠까. " 짜릿하고 술렁이는 고민을 하며 즐긴다.

어차피 살 형편이 아니라면 그런 생각이라도 하면서 보는 맛도 나쁘진 않다.

문제는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그림을 보는 안목이 생기겠나. 살 생각으로 봐야 진지한 자세가 될 게 아닌가.

그리고 아끼는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갖고 화랑을 찾을 게 아닌가. 그림의 떡이라 체념한 채 건성으로 보니 내 수준이 언제까지나 치졸하고 저급이다. 그게 누구 책임인가.

이게 어찌 나만의 문제랴. 문화수준이 낮은 건 그림 값이 높기 때문이다. 이게 우리 미술 발전의 저해요인이라고 나는 진단하고 있다.

왜 그렇게 비싸요? 끝내 막가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값이 싸면 작가도 싸구려 취급을 받기 때문에 체면상 비싸야 한다고 귀띔해 준다. 해서 한 점도 안 팔리는 전시회도 더러 있다는 것이다.

"그거 잘됐다. 제가 무슨 억대 일류라고. " 물론 내 고약한 심보에서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다.

"그러고 어떻게 작품활동을?" "말이 아니지요. "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도 그려야죠. 언젠가의 그날을 위해.

그래서였을까. 인사동 골목을 빠져 나오며 문득 반 고흐 생각이 난다. 살아 있는 동안 딱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않은, 알아주는 이도, 관심도 없었다. 안 판 건지, 못 판건지도 분명치 않다.

하지만 얼마 전 해외토픽엔 그의 '헌 구두' 그림 한 점이 30억원에 팔렸다는 소식이다.

난 그가 연작으로 그린 헌 구두 그림을 무척 좋아한다.

내가 본 것만도 여러 장이지만 하나같이 낡아빠진, 바닥엔 구멍이 뻥 뚫린 구두다. 자기 것인지, 광부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가 쉽게 접하고 바라볼 수 있는 건 헌 구두뿐. 가난한 그가 미인모델을 구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그것밖에 달리 그릴 게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가 만약 번쩍거리는 새 구두를 그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찔한 생각이 든다.

그의 주변엔 물론 새 구두가 있을 턱도 없지만, 낡고 헌 구두였기에 그 그림엔 천근의 무게가 실린다. 지치고 힘든 인생길을 터덜터덜 쉼 없이 걸어온 세월의 무게가 겹겹이 쌓여 있다.

낡은 구두였기에 거기에 철학적 뉘앙스까지 많은 이야기를 담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난했지만 그의 예술은 풍요롭다.

배부른 예술가를 경멸하는 풍자는 지금도 남아 있다. 배가 부르면 예술이 안된다는 극단론자의 목소리는 지금도 살아 있다.

고흐의 인생과 예술을 지켜보노라면 이런 논리도 설득력이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도 실감이 난다.

하지만 왜 예술가라고 꼭 가난해야 할까. 세계적인 예술가 중엔 부자도 많다. 우리 화단도 좀 넉넉했으면 좋겠다.

견문도 넓히고, 안락한 화실, 그림 재료라도 마음대로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궁색하지 않아야 그림도 넉넉할 게 아닌가. 묘안이 없을까 생각하다 쓴소리도 하게 됐다.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시형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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