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 아트센터서 '1980년대 리얼리즘과 그 시대' 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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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군부독재의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80년대. 극도로 억눌린 사회였지만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치열했다.

노동운동, 여성운동, 반미운동, 통일운동, 환경운동…. 그 속에 미술운동도 서있었다.

각종 시위 때마다 걸리는 대형 걸개그림과 팜플릿, 책자에 담긴 삽화.판화들은 강렬한 주제와 표현으로 독재를 고발하고 저항정신을 일깨웠다.

이른바 민중미술 운동은 작품 압수와 작가 구속의 탄압속에서도 공감대와 활동폭을 넓혀갔다.

민중미술은 그 이념적 성향과 함께 리얼리즘이란 표현방식으로 보는 사람들을 격렬한 호흡에 빠져들게하는 마력을 지녔다.

90년대, 사회주의의 붕괴와 세계화의 여파속에 그 지평이 좁아드는 느낌인 민중예술은 또 하나의 미술사적 반추(反芻)거리로 남을 것인가, 또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민중미술이 주축이 되는 1980년대 리얼리즘의 흐름을 정리하는 대규모 전시회가 16일~4월 1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1980년대 리얼리즘과 그 시대' 전이다.

가나아트가 소장한 리얼리즘 계열 작가 45명의 2백여점 중 대표작 1백여점을 3개 전시장에 펼쳐놓는다.

가나아트는 전시후 2백여점을 모두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할 예정이다.

기획자인 김민성 큐레이터는 "여기서 리얼리즘이란 예술을 통해 현실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포괄적인 의미" 라고 말한다.

사회변혁을 추구했던 민중미술 계열이 주로 포함된 것은 따라서 당연하다.

여기에 동시대의 현실적인 정서.주제의식을 반영한 박생광, 이상국, 이응노씨 등의 비구상 작품도 포함시켰다.

전시작은 구상과 비구상으로 나눠서 볼 수 있다.

주제와 표현방식이 모두 현실적인 구상계열의 작품으로는 강요배.김정헌.김용태.오윤.박흥순.박생광.손상기.심정수.임옥상.홍선웅.황재형 등의 80년대 상반기 작품이 꼽힌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중요한 것만 크게 그리는 방식, 르네상스 벽화같은 나열식 구도, 소재를 동등하게 배치하는 꽃꽃이식 배열, 이야기체 구성, 표현적인 색채사용 등을 통해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을 꽤하는 작품들이다.

강요배의 '맥잡기' 는 붉은 깃발을 들고 앉아있는 농민을 통해 농촌 현실을 고발했다.

김정헌의 '풍요한 삶을 창조하는 럭키모노륨' 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모내기하는 농부의 뒷모습을 통해 산업화속의 인간성 말살을 지적했다.

오윤.홍성담.홍선웅의 판화 역시 강렬한 주제와 표현방식을 드러낸다.

조각에서도 고뇌하는 인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홍순모의 인물부조나 심정수의 '응시' 같은 작품은 현실에 대한 고민을 직접 토로한다.

현실문제를 주제로 삼는 80년대 리얼리즘에는 비구상 작품도 많다. 재현의 사실성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이나 감정이입을 많이 반영하는 것들이다.

모순된 현실을 이상향과 융합시켜 초현실적으로 변형시키려했던 신학철, 실존하는 사물이나 생물을 임의로 중첩배치하면서 색채의 본질을 보여주는 박생광, 문자의 소통개념과 미술의 현실성 획득을 연계시킨 이응노, 굴절되고 일그러진 정물을 통해 현실의 상흔을 표현한 오경환, 밥상위에 고무신을 놓거나 땅바닥에 밥그릇을 놓음으로써 부조리한 현실을 꼬집은 이종구, 색채를 표현적으로 사용해 현실문제를 시각적으로 제기한 안창홍 등의 작품을 보여준다.

그리고 90년대의 산물로는 모순된 현실을 노골적 방법이 아니라 그 흔적을 통해 표현하는 전병현.전수천.홍순명의 작품이 소개된다.

이번 전시는 9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민중미술 15년전' 에 이은 대규모 평가전이다.

현재의 시각으로 미술사적 의미를 조망하는 자리이면서 관객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기회이기도 하다.

미술평론가 최열씨는 "민중미술이 추구했던 해방의 가치, 인간의 가치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다시금 물어야 할 현실 문제" 라고 강조한다. 02-720-1020.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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