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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케의 나라에서 소주의 신세계를 만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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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호 04면

연평균 18도로 한겨울에도 포근한 봄 날씨를 유지한다는 사전 정보를 믿고 가볍게 옷을 입은 허 화백. 가고시마(鹿兒島) 공항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대합실로 돌아가더니 서울에서 입었던 겨울 옷을 부랴부랴 꺼낸다. 마중 나온 현청 직원은 예상 밖의 추위가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미안한 기색을 보인다. 허 화백이 “실수를 눈감아 줄 테니 따뜻하게 데운 사케(さけ) 한잔 사라”며 농담을 건네는 순간 직원의 표정이 변한다. 니혼슈(日本酒) 하면 당연히 사케인데 가고시마에서만큼은 니혼슈는 쇼츄(燒酒), 바로 소주이기 때문이다. 가고시마에서 술 한잔하러 가자는 말은 곧 소주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며 허 화백이 맞장구를 치자 소주도가 메이지구라(明治)로 자신 있게 안내한다.

일본 가다 : 가고시마 첫 번째 이야기-고구마 소주

구마 소주에는 삼겹살 안주가 제격
일본의 여느 지방과 달리 가고시마에서 유독 소주가 발달한 이유는 기온과 토질의 영향이 가장 크다. 앞서 말했듯 연중 따뜻한 기온 때문에 낮은 알코올 도수의 사케는 자주 변질됐으며 화산재로 이루어진 토질은 쌀 부족으로 이어져 술 빚기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치명적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가고시마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불을 사용해 도수를 높이는 증류법과 화산재 토질에 적합한 고구마다. 본디 우리나라에서도 청주(淸酒)를 불로 증류해 내린 술을 소주라 칭하는데, 고구마 소주 역시 기본적인 방법은 이와 비슷하다.

메이지구라의 소주 제조 공정은 다음과 같다. 일단 찐쌀에 균을 넣고 이틀간 발효해 누룩을 얻는다. 이어 누룩에 물과 효모를 넣고 섞는 1차 담금을 6일간 진행하고 고구마를 쪄서 다음 공정을 준비한다. 이때 사용하는 고구마 품종은 고가네센간으로 주조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품종이다. 1차 담금이 끝나면 찐고구마와 물을 넣고 2차 담금에 들어가는데 때에 맞춰 큰 주걱으로 천천히 저어주는 작업이 이어진다. 독 안 온도를 7~8도로 안정시키고 산소를 공급하며 동시에 탄산가스를 빼는 과정으로 장인들의 세심하고 예민한 손길이 필요한 순간이기도 하다. 줄과 열을 반듯하게 맞춘 항아리들을 옮겨 다니며 주걱을 젖는 장인의 모습이 마치 진시황 무덤의 토병(土兵)을 만드는 도공의 모습과 같다며 허 화백의 감성적인 평이 이어진다.

2차 담금이 끝나면 알코올 도수 15도의 술을 얻고 한 번의 증류를 통해 최종적으로 37도의 소주를 얻게 된다. 원주(原酒)는 더욱 부드럽고 순한 풍미를 얻기 위해 3개월에서 최장 10년까지 숙성을 거쳐야 비로소 그 맛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소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주조장을 나와 시음장으로 들어서니 허 화백의 얼굴이 환해진다. 5~7가지 정도 소주를 시음할 수 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밀려오는 표정이다.

홍보담당의 설명과 함께 조심스럽게 소주를 넘기던 허 화백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다소 거칠고 묵직한 소주 특유의 목넘김은 이해할 수 있지만 생소한 향이 신경 쓰인다는 반응이다. 고구마 소주 특유의 향이 한국인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홍보담당이 기다렸다는 듯이 회심의 일격을 가한다. 그가 내놓은 소주는 170여 년 전 메이지 시대의 제조법을 그대로 재연해 만든 반쇼코(蕃薯考)라는 이름의 술. 껍질을 깎은 고구마와 대나무 숯을 이용해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풍미와 뒷맛이 자랑이라고 한다. 너무 깔끔해서 오히려 일본인들에게는 인기가 낮지만 한국인들에게 충분히 통할 맛이라는 것이다. 예의 진지하게 한 잔을 넘긴 허 화백이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안주로 삼겹살 좀 구워보라”며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든다. 고구마 소주를 처음 접하는 한국인들에게 최적의 소주로 안성맞춤이라는 뜻일 게다.

한국은 원샷, 일본은 미즈와리
한국인들은 소주를 작은 잔에 따라 원샷으로 넘기지만 일본인들은 알코올 도수에 상관없이 대개 미즈와리(水割り)로 조금씩 마신다. 미즈와리란 보통 맥주컵에 얼음을 넣고 물로 소주를 희석해 마시는 방법이다. 고구마 소주 역시 미즈와리가 대세지만 여기에 가고시마만의 특별한 방법이 숨어 있다. 먼저 보통의 미즈와리 방식과 달리 가고시마에서는 전통적으로 하루 전날 미리 소주에 물을 섞어 준비한다. 소주와 물의 비율은 5:5 혹은 6:4며 보관은 평범한 용기가 아닌 가고시마의 흙으로 구운 구로죠카라(黑千代香)라는 주전자를 이용한다. 이렇게 하룻밤 숙성을 거치면 소주와 물이 잘 섞여서 부드럽고 풍부한 맛을 최대한 이끌어낸다고 한다. 여기에 마시기 직전 사람의 체온 정도로 데우면 향까지 살아나 고구마 소주 본연의 풍미를 완벽하게 즐기게 되는 것이다.

안주로는 가고시마 명물인 튀김어묵 사쓰마아게(さつまあげ)와 기비나고(きびなご, 샛줄멸)회가 제격이다. 가고시마 제일의 번화가 덴몬관(天文館)을 찾으면 소주 바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110여 개의 양조장에서 내놓은 다양한 소주들이 애주가들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한다.


*일본자치체국제화협회 클레어(Clair)와 한진관광의 후원으로 2년간 일본을 방문해 다양한 요리와 온천 문화, 자연을 경험하고 그 체험을 독자들과 나눌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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