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55>소설 '特質考' 파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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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호 10면

오영수는 조연현 등의 천거에 의해 1955년 창간된 ‘현대문학’의 초대 편집장으로 발탁됐다. 나이는 이미 40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등단 5~6년차로 아직 ‘신인 딱지’를 떼지 못한 그로서는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작품 보는 안목이 높고, 성격이 좋아 대인관계가 원만하며, 성실하다는 점이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는 66년 위궤양 수술을 받고 물러날 때까지 12년을 봉직했다. 어릴 적부터 병약했으나 젊은 시절 돈벌이를 위해 만주로 건너가 여러 해 고생하면서 모르는 사이에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현대문학’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작품도 일 년에 단편소설 한두 편 발표하는 게 고작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오영수는 서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아들 오윤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자 낙향을 결심한다. 75년 오윤을 결혼시켜 서울 집에서 살게 한 뒤 오영수는 아내와 함께 고향인 경남 울주로 낙향했다. 낙향 후에도 창작열은 식지 않아 뜸하나마 소설은 계속 쓰고 있었다. 77년 겨울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잃어버린 도원』이 ‘공식적’으로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었다. 그 이듬해인 78년 겨울 ‘문학사상’의 청탁으로 쓴 글이 큰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문학사상’ 79년 1월호에 발표된 『특질고』라는 제목의 이 글은 소설란에 실리기는 했으나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에 가까운 글이었다.

이 글은 서울을 비롯한 각 도 사람들의 성격, 버릇, 말투 따위의 장단점을 직설적으로 풀어놓고 있었다. 가령 경상도 사람은 ‘미련하고 붙임성 없고 눈치 모르고 무작하다’거나, 전라도 사람은 ‘표리부동하고 신의가 없다’거나, 강원도 사람은 ‘네 맛도 내 맛도 없는 무덤덤’, 충청도 사람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의 무개성’ 하는 식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호남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할 만한 거친 표현들이 특히 눈에 띄긴 했다. 이 글이 실린 잡지가 78년 말 시중에 깔리면서 호남지역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급기야 ‘문학사상’은 자진휴간을 발표했고, 오영수 명의의 사과문이 각 일간지에 광고로 실렸다. 주간 이어령은 수습을 위해 여러 날 동분서주해야 했다. 오영수는 신문광고로 게재된 사과문에 이렇게 썼다.

“…불초소생은 제 자신에게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었으니 도민 제현의 처분만 기다릴 뿐 무엇을 변명하고 또 무엇을 밝히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여러분들의 손상된 마음과 명예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붓을 꺾고 대죄 근신하겠습니다….”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회문제를 야기하는가를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59년 여름에 발생한 이른바 ‘하와이 근성 시비’ 사건이다. 대중잡지 ‘야화(夜話)’ 7월호에 실린, 호남사람들의 성정을 비판한 시인 조영암의 글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는 누가 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호남사람들을 싸잡아 공박했다. 책이 발매되자마자 광주 시민 수만 명이 규탄대회를 열었고, 지역 언론들은 연일 대서특필로 관련자들의 엄벌을 촉구했다. 마침내 잡지는 판매금지에 뒤이어 폐간조치됐고, 필자 조영암과 발행인, 편집책임자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관련자 세 사람은 실형을 선고 받고 6개월을 복역해야 했다.

의문인 것은 10여 년간 문예지의 편집장을 지낸 오영수가 세상을 온통 시끄럽게 한 ‘하와이…’ 사건을 모를 까닭이 없고, 자신의 글이 일으킬 파장을 짐작하지 못했을 리 없는데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주변 사람들은 칠순의 고령인 데다 병약해 판단력이 흐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오영수의 추천으로 등단한 소설가 한용환은 『특질고』가 “정신이 흐릿해진 상태에서 대가인 당신이 쓰는 글은 모두 빼어난 소설이다 하는 과대망상으로 써진 잡문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그런 잡문에 정색으로 맞서려 했던 사람들의 반응이 오히려 지나쳤다”고 했다.

70년대 이후 10년 가까이 ‘현대문학’ 편집장을 역임했고, 오영수와 친분이 두터웠던 김국태에 따르면 오영수는 낙향하기 얼마 전부터 이따금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꼭두새벽에 느닷없이 제자나 후배의 집을 찾아와 커피를 달라고 하는가 하면,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니며 무슨 소린지 모를 말을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는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두어 달 전에는 몇몇 문인을 서울 집에 초대했는데 자신이 겪은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영수는 『특질고』 파문으로 곤욕을 치른 지 5개월이 안 된 79년 5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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