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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를 다지자] 27.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 기록물관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나는 2년 남짓한 보직교수 생활을 얼마전 끝냈다.

그때 버리기엔 아깝지만 둘 데가 마땅치 않은 기록이 많아 개인 연구실로 가져와 보관하고 있다. 교수가 정년이 되면 자료실 직원이 득달같이 찾아와 연구실에 있는 모든 기록을 상자에 담아가 보관하는 외국 대학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전 경기도내 어느 시의 도시계획담당 공무원을 만났더니 행정기관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야기 중 "도시확장과 관련한 업무를 하다보면 종전 기록들이 필요한 경우가 많지만 보존기간 때문에 사무실에 둘 수 없어 기간이 지난 문서와 도면을 집에 가져다 놓고 있다" 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의 기록 중 일부는 영구보존 대상이고 나머지는 보존연한이 3년.5년.7년.10년 이상으로 분류돼 있다.

하지만 영구보존 대상은 극히 적어 필요한 서류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기록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최고 권부인 청와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정권이 바뀌어 청와대에 들어간 인수팀은 대통령과 관계된 각종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크게 놀랐다고 한다. '대통령 기념관' 이 아니라 '기록관' 을 만들어 전임 대통령이 재임시 다룬 중요한 문제에 관한 문서와 기록들을 보관하고 일반인도 활용할 수 있게 하는 미국과는 너무 다르다.

기록을 왜 남기고 보존해야 하나. 우선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데 기록이 참고자료로 필요하다.

또 이해당사자 등 기록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령을 지난해 공포해 기록의 생산과 보존을 의무화했다. 그런데도 가장 체계적으로 기록을 보존해야 할 정부의 각급 기관과 지방자치단체들은 법령이 규정한 시설과 전문인력을 확보하지 않고 있다.

정책의 입안과정에서부터 기록을 남겨야 할 필요가 있는데도 기록생산을 꺼린다. 설령 기록을 만들더라도 그 내용이 미묘하다 싶으면 보존하지 않으려 한다.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해 가급적 증거를 남기거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심리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할 수 있다. 정확한 기록과 보존은 투명.책임행정 및 정직한 사회구현에 필수적인데도 말이다.

안병우<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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