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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신좌파 실험] '신진보주의' 로 궤도 수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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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실업자 1백만명 감소, 인플레이션 30년래 최저 수준, 연평균 2%대 이상의 경제 성장률 지속. 토니 블레어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 4년 동안 이룬 경제 치적이라고 자랑하는 부분이다.

물론 야당인 보수당은 마거릿 대처.존 메이저 전 총리가 18년 동안 고질적인 영국병을 치유해 놓으니까 노동당이 나타나 열매만 따고 있다고 평가절하한다. 블레어가 집권한 1997년 이후 미국과 유럽의 경제가 호황이었다는 점에서도 노동당의 자랑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러나 블레어에게 경제는 정치생명이 달린 문제다. 그는 BBC 신년인터뷰에서 "다음 총선의 쟁점은 경제" 라고 힘주어 말했다.

블레어는 4년 전 '새로운 노동당(New Labour)' 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더이상 노동당은 기업과 충산층 이상에 세금을 많이 걷어 국가경제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정당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복지비용을 늘리기 위해 공공지출을 확대해 물가가 오르고 실질소득이 감소하던 과거 노동당식 국가운영에서 탈피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렇다고 자유시장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보수당의 정책을 따르겠다는 것도 아니다" 고 못을 박았다. 국가통제와 국가방임의 중간인 '제3의 길' 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득세를 인상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걸면서도 초등학교의 학급당 학생수를 모두 30명 이내로 줄이고 국립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환자가 10만명이 넘지 않도록 하는 등 복지수준을 향상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공공지출을 늘리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으로 정부를 운영해 실질적 복지수준은 높이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는 소득세를 올리지 않겠다는 공약을 지금까지 지켜 노동당을 불신하던 유권자들을 안심시켰다. 또 경제성장에 힘입어 새로운 노동당의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놓았다.

그러나 보건.교육 등에 대한 약속은 완전히 이행되지 않았고, 영국 언론은 연일 수술을 받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환자와 교육 불평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그결과 "제3의 길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제3의 길이란 인간의 탈을 쓴 대처주의에 불과했다" 는 비난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노동당 의원 60명이 그에게 "당신은 지나치게 우경화되고 있다" 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당 내부의 반발이 심해지자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인물들만 중용해 측근정치를 편다는 지적을 받았고, 그 측근들이 비리에 연루되는 등 악재가 잇따라 한때 80%대에 달했던 국민의 지지율이 최근 50%대로 추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블레어를 실패한 정치인으로 보기에는 이르다. 그는 "민주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통합하는 중도좌파의 이념은 계속 진화 중" 이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제3의 길이라는 표현 대신 '신진보주의(New Progressivism)' 라는 용어로 자신의 이념을 다시 정의하고 있다.

그는 "사회정의와 균형을 이루는 진보,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를 버리지 않는 세계화" 가 신진보주의의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수개월 뒤 치러지는 총선에서 무난히 재선될 것으로 여기고 있는 블레어는 복지와 시장을 절충하는 정치실험의 후반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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