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더 많은 김무성이 나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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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때 친박계 좌장으로 불렸던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이 세종시 관련 절충안을 낸 후 벌어진 논란이 바로 그 경우다. 김 의원은 세종시 교착 국면을 풀기 위해 수정안을 채택하고 대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등 7개 독립기관을 세종시로 이전시키는 방안을 냈다. 친이계와 친박계의 입장을 중간에서 절충하자는 것이다. 그러자 양쪽에서 난리가 났다. 그가 속했던 친박계에선 격앙된 분위기로 그를 파문할 태세다. 박근혜 전 대표와 철학이 맞지 않는 사람이 감히 신성한 세종시 약속을 깨고 박 전 대표에게 누를 끼치려 하다니! 친이계의 반응도 차갑다. 백년대계를 위해 세종시 계획을 완전 수정하겠다는데 감히 장사꾼 흥정처럼 어정쩡한 타협안으로 훼방하려 하다니!

이러한 양쪽의 비난은 정당한가? 혹자는 김 의원의 진정성에 의심을 표한다. 박 전 대표와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혹은 그쪽의 승산이 낮아지면서, 변신을 꾀하기 위해 시도한 치졸한 책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의 동기에 대한 비판은 일방적·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누가 과연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그의 동기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정치인은 행동과 그것이 초래한 결과로 평가받아야지, 파악하기 힘든 동기로 비난받아선 곤란하다.

김 의원에 대한 평가는 그의 절충안이 결국 긍정적 효과를 낼 것인가에 입각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이 시점에 향후 100년은 고사하고 10년, 20년 후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까? 세종시 원안론자도 수정론자도 그러한 예지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절충안도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단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충안의 최대 장점이 있다. 단기적으로 계파 간 중간적 조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원안론자도 수정론자도 한 치의 양보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외나무다리 대결을 피하고 막힌 정국을 푸는 데 중도적 절충안이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한쪽의 절대적 지지를 받지만 다른 쪽의 절대적 반대를 받는 방안보다 양쪽에서 다 찜찜하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 즉 차선책을 찾는 것이 현실정치의 묘미 아니겠는가?

미국 정치의 윤활유는 소수의 중도 의원이다. 민주당 소속이지만 때론 진보적 의제에 반대하는 의원들, 공화당 소속이지만 때론 보수적 의제에 제동 거는 의원들, 정파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야말로 미국 정치가 고질적 교착에 빠지지 않고 중간적 타협을 통해 원활히 작동될 수 있게 해주는 공신이다. 요즘 오바마 정부가 국정 난맥에 빠진 이유는 중도 의원들의 감소로 정당 간 양극적 집단대결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의 근본적 문제는 경직된 집단주의에 있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정당·계파만 따르지 않고 중간에 서는 김무성 같은 정치인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절충안을 내는 정치인이 욕보다는 칭찬을 들어야 한다. 과거 민주주의가 요원했던 시절엔 중간 서기가 불가능했다.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이분법적 대결에서 중간적 존재는 회색분자, 사쿠라 등으로 마땅히 비난받았다. 그러나 오늘은 민주주의가 상당 수준에 오른 시대 아닌가? 내 친구가 아니면 적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적 집단주의 사고를 벗을 수 있는 시대다.

세종시 원안이든 수정안이든 자기네 입장이 절대적으로 옳으므로 꼭 이겨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다. 반면 어느 것도 절대적일 수 없으므로 중간적 절충·조정을 통해 정면대결을 막고 교착을 풀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지혜의 수준까지 나아간 것이다. 현실정치의 핵심은 한쪽의 승리로 다른 쪽에 상처를 주며 갈등구도를 굳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비기기 전략으로 갈등을 줄여나가는 데 있다는 점을 곱씹어봐야 한다. 정치는 승패를 명확히 내는 운동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임성호 경희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