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도 벤처도 돈되면 다 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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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연초 기업들의 최우선 과제는 '살아남기' 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경기가 급격히 악화되고 자금시장마저 얼어붙으면서 크고 작은 기업들이 새로 사업을 벌이기보다는 방어적인 경영에 주력하고 있다.

이들은 주식이든, 공장이든 팔릴 만한 것은 일단 처분해 빚을 줄이며 현금을 챙기고 있다.

기업들은 1월 증시가 반짝 상승세를 보이긴 했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 아래 자산매각이나 외자 유치에 주력하고 있다.

◇ 매물 홍수〓대기업 가운데 매각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현대그룹이다.

현대건설이 계동 본사 사옥을 내놓은 것을 비롯해 현대전자가 1조원어치의 매물을, 현대상선은 선박 8척(2천4백억원 상당)의 매각을 추진 중이다.

현대석유화학은 지난해 11월 PVC사업 부문을 LG화학에 넘긴 데 이어 국내외 유화회사들과 지분 매각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여유가 있는 그룹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8백77억원 규모의 자산을 매각했던 삼성물산은 올해 3천2백억원어치를 팔 계획이다.

LG전자는 1조원 규모의 유가증권과 자사주를 매각해 부채비율을 낮출 계획이며, LG산전도 LG캐피탈.데이콤 지분과 보유 부동산을 처분할 방침이다.

두산은 OB맥주 구미 공장 부지 6만7천여평(장부가액 7백억원)과 50%의 지분을 갖고 있는 두산CPK 보유 지분 중 절반 이상을 미국 회사에 매각하기 위해 협상 중이다.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기업도 팔릴 만한 자산을 내놓고 있다.

대우전자는 외국 자본에 자산을 잘라 파는 협상을 진행 중이며, 새한은 올해 마포 본사 사옥(장부가 3백76억원)과 원사.원면사업, 전지사업 부문을 매각하는 등 총 8천억원어치를 시장에 내놓았다.

◇ 정보기술(IT)기업에 거대 매물 많아〓지난해 극심한 경영난을 겪은 국내 IT 기업들도 외국계 업체에 속속 넘어가고 있다.

올 들어 옥션이 미국의 인터넷 경매업체인 e-베이에 팔렸고, 한글과컴퓨터는 현재 존홈스인베스트먼트로부터 3천만달러의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실사를 진행 중이다.

두루넷도 곧 최대주주가 삼보컴퓨터에서 일본의 소프트뱅크로 바뀐다.

국내 대표적 통신기업인 한국통신과 SK텔레콤의 해외지분 매각도 이르면 3월 중 이루어질 전망이다.

한국통신은 지분과 한국통신프리텔.한국통신엠닷컴.한국통신IMT-2000 등 3개 자회사의 지분까지 포함해 매각규모가 5조~7조원에 달할 전망이며, SK텔레콤 역시 지분 15%를 5조원 안팎에 일본의 NTT 도코모에 매각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다.

매물로 나와 있는 부동산도 많다. 지난해에는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등 11건 1조원어치의 빌딩들이 외국에 팔려나갔다.

올해 새로 주인을 기다리는 매물도 10여건 1조5천억원 상당으로 추정된다.

◇ 제값 못 받아 고민〓기업들이 자산매각에 나서는 이유는 크게 두 갈래다. 비주력사업을 팔고 주력사업에 집중하거나 빚부담을 덜기 위해서다.

두 가지 모두 은행 돈 빌리기나 회사채 발행 등을 통한 직.간접금융이 어렵기 때문에 추진되는 것이다.

현대전자 박종섭 사장은 "우리 반도체기술은 세계가 인정하고 있으므로 이 부문에 집중하기 위해 통신.액정표시장치(LCD)부문 등을 분리하고 불필요한 자산을 매각한다" 고 말했다.

새한 관계자는 "워크아웃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회사 덩치가 대폭 줄어들더라도 팔릴 만한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그러나 워낙 단기간에 많은 매물이 나오다 보니 제값을 받기가 어렵다는 점이 고민이다.

LG산전 관계자는 "지난해 말 3백50% 수준인 부채비율을 더 떨어뜨리기 위해 데이콤 지분 등을 팔아야 하지만 현재 가격이 워낙 떨어져 있어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고 말했다.

닷컴 업체인 A사 사장은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기가 어려워 외국계 회사와 경영권을 포함해 지분 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다" 고 말했다.

산업부.정보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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