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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國寶)의 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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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나라 국보 제1호는 남대문이다. 나라의 보배로 그 가치가 남달라 국가가 보호.관리하는 문화재 1등이지만 우리가 정한 국보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중요문화재 보존령을 내리며 지정한 것이다. 보물 제1호 동대문도 마찬가지다. 건축미가 그리 뛰어나다고 볼 수 없는 조선왕조의 한낱 건축물을 5000년 한민족 문화의 으뜸 상징으로 결정한 일제의 속뜻을 짐작해 볼 수 있다.

7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남이 정해준 국보 1호를 모두가 자랑스레 외우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몇몇 뜻있는 이들이 국보 1호를 바꾸자는 의견을 여러 차례 밝혔다. 식민지 시대가 남긴 일종의 문화적 낙인을 독립한 뒤에도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꼴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타당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문화 자존심을 되찾자는 진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당당한 국보 제1호 감은 무엇일까. 학계와 문화계 인사가 한 목소리로 드는 보배가 '훈민정음'이다. 세계에서 가장 젊은 말글로서 빼어난 과학성을 인정받은 '훈민정음'이 국보 70호로 밀려나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로 시작하는 세종대왕의 창제 정신은 민족의 자주성을 마디마디 새긴 일종의 문화독립 선언이었다.

이 귀중한 문화재도 자칫 사라질 뻔한 위기가 있었다. 1930년대 말,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을 가보로 보관해 오던 곳은 경북 안동의 이한걸 집안. 때는 조선총독부가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교육을 없애고 일본어만 쓰도록 강요하던 1938년으로'훈민정음'은 보는 시각에 따라 위험한 소장품이었다. 이때 나선 이가 간송 전형필(1906~62)이다. 십만 석을 일컫는 집안 재산을 일본으로 빠져나갈 뻔한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데 바친 그가 이 명품을 놓칠 리 없었다. 서울 인사동 골동 거리의 상인으로부터 '훈민정음' 소식을 들은 간송은 감격하고 흥분해 당시 집 몇 채 값을 아낌없이 내놓았다고 한다.

'훈민정음'을 비롯해 아직 갈무리가 다 끝나지 않은 간송의 소장품이 모여 있는 곳이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다. 해마다 봄.가을로 기획전을 마련해 우리 전통 문화의 우수함을 널리 알리는 이곳에서 지금 예순일곱번째 정기전으로 '현재대전(玄齋大展)'이 열리고 있다. 우리들 마음의 국보 1호 '훈민정음'이 살아 숨 쉬는 집이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