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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 칼럼] 누구에게 돌을 던지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5, 6공 시절 금융계의 황제로 알려져 있던 이원조(李源祚)라는 정치인이 있었다. 정치자금이 말썽날 때마다 몸통으로 그의 이름이 떠올랐지만 아무도 그를 어쩌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김영삼(金泳三)정부 시절 마침내 쇠고랑을 찼다.

정치자금 모집의 창구로 알려졌던 그도 정치자금 한푼 안받겠다던 YS에게는 약발이 안통하는가 싶었다.

*** 반발하는 불법 혐의자들

그에 대한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들끓을 때 그는 가족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들어가게 되면 여러 사람이 다치게 된다" 고. 그리고 그는 잠시 실형을 살다 풀려났다. 그를 너무 오래 잡아두기엔 그가 소유한 정치자금에 관한 정보가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안기부 예산의 신한국당 선거자금 전용사건을 둘러싼 여야의 공방도 비슷하다.

검찰이 신한국당의 15대 총선자금으로 안기부 예산을 빼돌렸다고 하자 한나라당은 오히려 DJ정치자금을 물고 늘어진다.

YS통치자금설이 도마에 오르자 그는 연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20억원+α에 대한 수사가 서둘러 종결된 배경을 흘리고, 실명제 실시 후 DJ의 것으로 보이는 뭉칫돈이 발견됐더라는 말도 퍼뜨린다.

정치자금이 불법적이면 당연히 수사받아야 한다. 그게 '간첩잡는 돈' 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외국의 경우는 이보다 훨씬 덜한 혐의로도 거물정치인의 정치생명이 하루아침에 끊어지고 만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불법의 혐의를 받는 자들이 되레 집권층의 비리정보를 공격한다.

불법혐의자의 연행에 공당(公黨)이 공공연하게 저항하는데도 그게 오히려 동정을 받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한마디로 우리 정치자금이 애시당초 잘못 걷혀지고 잘못 쓰여지고 잘못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金대통령은 늘 "평생 불법적인 돈은 한푼도 안받았다" 고 주장한다. 돈은 받았으되 불법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자금법에 따르면 정치인이 받을 수 있는 돈은 당비.후원금.기탁금밖에 없다.

이런 조항에 걸리지 않을 정치인이 없으므로 검찰이 발명(□)해낸 것이 이른바 '대가성' 이다. 정치인이 돈을 받되 그것이 특정청탁의 대가가 아니면 괜찮다는 것이다.

정치자금법을 사실 사문화시킨 이 '불법적인' 법 해석으로 지금 재판 중인 한 사건에서처럼 수십억원의 돈을 받은 정치인이 당당하게 "대가성이 없었다" 며 결백을 주장하는 해괴한 꼴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가성의 해석은 대단히 자의적이다. 정치인이 조달한 돈의 적부(適否)에 대한 판단은 검찰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검찰권을 확보한 정권이 이를 얼마든지 정치적으로 왜곡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이 정권이 집권한 후 실시된 광명보궐선거는 유례없는 돈선거였고 지난 4.13 총선도 돈선거 시비로 얼룩져 선관위가 고발까지 했지만 검찰은 이를 '정치적' 으로 처리했다는 의혹을 샀다.

검찰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안기부 자금 리스트에 김종호(金宗鎬)자민련 총재권한대행 등이 빠져 있었던 것은 정치적 왜곡의 산 증거다.

신한국당 의원후보가 2백99명이었는데 1백72명만 받고 나머지는 왜 안받았을까. 정치자금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없어지지 않고 권력에 의한 정치개입 유혹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정치자금을 둘러싼 정치보복극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 정치자금법 정비 바람직

이번 안기부예산 전용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전기가 돼야 한다.

만약 검찰 주장대로 간첩잡는 돈을 빼돌린 것이라면 그런 예산불법전용을 간여했을 대통령과 그의 아들, 안기부장과 경제부총리 등을 수사하든가, 만약 그것이 정치적으로 리스크가 많다고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이뤄져온 권력의 부당행위를 없애는 제도적 방안을 강구하는 쪽으로 가는 게 합당하다는 말이다.

올해도 어물쩍 넘어갔지만 안기부예산이나 각 부처에 은폐된 이른바 통치자금이란 것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정치자금법을 제대로 고쳐서 법정 정치자금 이외의 어떤 자금이든 대가성 여부에 관계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수십억원 먹고도 '불법적이 아니다' 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며, 검찰권을 가지고 장난질 치는 권력의 부당정치행위.정치보복의 악순환도 차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잃는 순간 그것이 자기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면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김영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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