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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글로벌 시대의 '약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미국의 금리인하 소식에 주식값이 폭등한 4일. 중견기업 A사장은 주가가 올라 기뻐하면서도 "글로벌 경쟁의 한복판에 서있는 느낌" 이라며 긴장했다.

과천 경제부처 B국장은 "허탈하다" 고 했다.

정부가 공적자금을 퍼붓고 연.기금 동원까지 들먹여도 꿈쩍 안하던 증시가 아닌가.

지난해 내내 고생한 악몽을 생각하면 환호성을 질러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도 해외 요인이 결정적 호재로 작용한 점이 B국장의 심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20년 넘게 정통 경제관료로 살아온 그는 "증시도 외제를 좋아하는 모양" 이라고 푸념했다.

이 말에는 정부 정책의 유효성에 대한 깊은 회의와 자조가 배어 있다.

'국산' 장관의 말에는 시큰둥하던 증시가 '외국산' 뉴스에서 생기를 되찾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새해 벽두의 이 '사건' 은 세 가지의 시사점을 갖고 있다.

첫째, A사장의 말은 정부든 기업이든 글로벌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난해의 각종 통계들은 우리 경제가 이미 글로벌 시장의 중심에 있음을 보여준다.

외국인 지분이 50% 이상인 은행이 많아졌다.

외국인의 주식비중은 30%를 넘었고 선물환 거래는 60% 이상이다.

외국자본이 1대주주인 은행의 시장점유율은 여신.수신 모두 40%를 웃돈다.

제조업체도 외국계가 잘 나간다.

모토로라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액 증가율은 2백66%, 한국바스프는 4백37%나 됐다.

원화 환율은 해외 요인에 의해 70~80%가 결정된다고 한다.

재경부.한국은행 관계자들은 "국내 요인의 몫이 30%도 안되니 정책에 한계가 있다" 고 털어놨다.

환경은 이처럼 급변했는데 정부.금융.기업은 글로벌 스탠더드와 거리가 멀다.

제일은행의 호리 행장이 이근영 금융감독원장을 찾아가 "정부 방침에 협조하겠다" 고 '맹세' 한 장면이 국제금융시장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재벌 오너가 안방에서 그룹의 장래를 좌우할 인사를 해치우는 게 우리 기업의 현주소다.

둘째, B국장의 말은 신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정부의 정책과 장관의 말이 시장에서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게 문제다.

백약(百藥)이 무효이던 주식시장이 살아날 기미를 보인 것도 따지고 보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해외 요인을 믿고 주식매입에 나선 게 계기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앨런 그린스펀 의장의 말 한 마디는 정책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린스펀 효과(Greenspan effect)' 라는 용어가 경제학계에서 통용할 정도다.

우리는 '그린스펀' 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기업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 어디를 봐도 멀쩡하던 대우그룹이 저 지경에 이른 게 국내기업의 투명성 수준이다.

월 스트리트의 기준에 맞출 각오로 기업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셋째, 우리 경제의 심장부가 글로벌 경쟁의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상품.자본.노동력이 자유롭게 이동하도록 경계를 없애자는 게 신자유주의의 정신이다.

하지만 보호막이 없으면 직격탄을 맞을 수 있음을 유의하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메뚜기 떼처럼 몰려다니는 외국자본이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초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눈 뜨고 있는데 코만 베어가는 게 아니다.

'심장' 을 꺼내 갈 수 있는 게 글로벌 세상이다.

이종태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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