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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사회적 지능을 높이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우리나라는 정치구조에 문제가 있어 깨끗한 정치인이 나오기 힘들지요?" 안기부 자금 유용 사건을 접한 중학교 1학년인 큰애가 던진 질문이다.

'구조' 라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한 것보다 큰애가 더욱 대견스러웠던 것은 어른들과 달리 무차별적인 정치불신을 드러내지 않는 점이었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신뢰' 에서 미국과 일본을 고신뢰 사회로, 한국을 저신뢰 사회로 분류했다.

하지만 미국.일본.한국에서의 신뢰수준을 실험을 통해 비교 연구한 결과 나는 후쿠야마의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과 협력을 하는 정도에 따라 신뢰를 측정한 이 실험에서 한국인은 다른 두나라 국민에 비해 적어도 행동에 있어서는 신뢰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여론조사를 통한 태도연구에서는 한국인이 일본인이나 미국인에 비해 신뢰가 낮게 나타났다.

최근 나는 한국인이 애초에 문화적으로 신뢰가 낮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능(social intelligence)이 낮기 때문에 행동에서는 높은 신뢰를, 태도에서는 낮은 신뢰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뢰연구의 대가인 야마기시는 사회적 지능이란 신뢰할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 내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회적 지능이 높은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만을 골라서 믿기 때문에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할 가능성이 작고 따라서 타인에 대한 높은 신뢰를 유지한다고 한다.

반면에 사회적 지능이 낮은 사람은 아무나 믿기 때문에 믿는 도끼에게 발등 찍힐 확률이 높고 따라서 타인을 불신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시민단체 대표 한두 명이 부도덕한 일을 행하면 모든 시민단체를 싸잡아 비난하고, 정치 비리가 터지면 총체적으로 정치를 불신하는 집단주의적 사고의 경향이 강하다.

이는 우리의 사회적 지능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권에 대한 총체적 불신과 냉소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해악이므로 이것 만큼은 피해야 한다.

국민이 잘못의 경중을 판단하고, 문제의 본질과 곁가지를 구분하는 능력을 갖춘다면 적어도 총체적 신뢰 위기는 피할 수 있다.

물론 정치권이 항상 일을 잘한다면 사회적 지능에 상관없이 고신뢰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이 국민을 실망시키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국민의 사회적 지능이 높다면 총체적 불신은 막을 수 있다.

안기부 자금 사건의 핵심은 정말로 안기부 예산이 유용됐는지와 책임자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일이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왜 음성적 정치자금 문제가 항상 우리 정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정치자금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오염원은 그냥 둔 채, 확인되지 않은 명단을 흘리고 자금을 전용한 의원을 선별 소환하겠다는 검찰의 태도는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물갈이를 했지만 우리 정치가 별로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모순된 구조는 유지한 채, 의원을 선별적으로 희생양으로 삼았기에 보스에게 맞서 싸울만한 소신 있는 다선의원은 살아남지 못했고, 경륜과 전문성이 떨어지는 초.재선의원만 남아 보스의 눈치를 살피기 때문은 아닐까.

요즘 정치권을 보면 여야 모두 막가고 있다. 언론도 독자의 판단을 믿는다며 확인도 안된 명단을 보도했다. 이런 때일수록 믿을 것은 국민의 높은 사회적 지능뿐이다.

하지만 의원들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니 비교적 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개혁적 정치인들만 집중포화를 맞고 있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중학생인 큰애가 주역이 될 시대에는 높은 사회적 지능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趙己淑(이화여대 교수 ·정치학)

▶필자 약력 : 이화여대 정외과 졸업, 미국 인디애나대 정치학 박사.

▶저서 : '지역주의선거와 합리적 유권자' '합리적 선택 : 한국의 선거와 유권자' '세계를 움직인 12명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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