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5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58. 진단키트 개발

필자의 글을 읽고 최근 미국 뉴욕에 사는 한 교포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도 80년대 중반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린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유행성출혈열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자신의 집 지하에 쥐가 많아 골치를 앓았다는 것이다.

그는 콜롬비아베테랑병원 등 미국내 일류병원에서 검진이란 검진은 모두 받았는데 원인을 찾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당시만 해도 유행성출혈열이 미국의사들에겐 생소한 것이었고 진단방법도 없었으니 의당 그랬으리라 싶다.

바이러스를 발견한 나의 다음 과제는 실제 환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간단하고 신속한 진단방법의 개발이었다.

나아가 예방백신과 치료제까지 개발한다면 금상첨화이리라. 당시 내가 사용하던 혈청검사는 실험실에서나 가능한 복잡하고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병원에서 의심되는 환자의 혈액을 뽑아 간단히 알아내는 진단키트 개발은 또 다른 문제다.

예컨대 페니실린의 발견은 1928년 플레밍에 의해 이뤄졌지만 이를 상업화해서 대량생산한 것은 50년대 들어 미국의 제약회사 파이저에 의해 실현됐다.

진단키트 개발에 골몰하던 필자에게 기회가 왔다. 78년11월 일본 도쿄대의대 임상병리학 토미야마교수로부터 편지가 왔다.

유행성출혈열 진단키트 개발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처음엔 토미야마교수가 일면식도 없는데다 편지도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적혀있어 국제적인 예의도 없는 건방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매우 진지하고 솔직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제일 가는 도쿄대의대 교수가 알지도 못하는 한국인 교수에게 공동연구를 제의했다는 사실 자체가 고맙기도 했다.

자는 그의 이력서를 보고 그가 일본 최고의 엘리트란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일본의 최고 수재들만 들어가는 동경부립 제1중학교, 제1고등학교와 동경제대 의학부를 졸업했다.

우리 식으로 보면 경기중.고교와 서울대를 나온 셈이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가 일본어로 쓴 것은 영어에 매우 서툴렀기 때문이었다. 놀랍지만 당시만 해도 일본 최고의 석학들도 영어엔 문외한인 경우가 많았다.

오해가 풀린 나는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는 라텍스 응집반응이란 혈청검사기법의 대가였다.

나는 한탄바이러스 항원을 조직배양세포에서 만들어 그에게 제공했다.

그는 이 항원으로 여러 종류의 라텍스 표면에 흡착시킨 후 환자의 혈청 중에 있는 항원과 응집반응을 일으키는지 연구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가 여러차례 서울을 오가며 연구를 계속했으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무려 9년이 지난 87년 겨우 실마리가 풀렸다.

필자가 쥐의 뇌조직에서 배양해 매우 순도가 높은 바이러스 항원을 얻는 실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토미야마교수 역시 고농도 입자응집반응이란 신기술을 개발했다. 이 두가지 방법을 결합해 시도한 끝에야 겨우 우리가 원하는 진단키트를 얻을 수 있었다.

89년 3월의 일이니 진단키트의 개발에 무려 11년이나 걸린 셈이다. 우리는 이를 90년 저명한 의학잡지 '아카이브즈오브바이롤로지' 에 게재했다.

그리고 진단키트의 제조및 판매는 녹십자사에 맡기기로 했다. 오늘날 전세계 병원에서 시행하는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의 진단은 모두 이때 개발한 진단키트에 의해 이뤄진다.

환자들은 병원에서 수백가지 검사를 무심코 받지만 이들 하나하나마다 관련 전문가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일본학자와도 공동연구를 하는 판에 왜 우리 학자들과는 공동연구가 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86년 토미야마교수는 동양인에게 흔한 가와사키병이 한탄바이러스와 관련이 있는지 연구해보자고 제의했으나 실패했다.

국내 학자들이 환자를 내게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