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밴쿠버] 모태범보다 센 근지구력…이 악물고 키운 22인치 ‘금벅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얘 좀 봐봐. 네가 여자냐?”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대표팀 동료들은 툭하면 이상화(21·한국체대)에게 이렇게 농담을 던진다. 다부진 체격(키 1m64㎝·몸무게 65㎏) 때문이다. 남자 스프린터에 버금가는 굵은 허벅지(둘레 22인치)에 목 뒷덜미 근육까지 잡혀 있다. 오빠들의 놀림에 이상화는 그저 뚱한 표정만 짓는다. 태릉선수촌에서 이상화는 ‘남자’다. 남자 대표팀과 함께 훈련하고 성격도 소탈하다. 표정과 말투가 무뚝뚝하지만 맺고 끊는 게 분명하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얼음 위에 이상화(花)가 피었습니다 이상화가 꽃다발 수여식에서 시상대에 올라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고 있다. [밴쿠버 로이터=연합뉴스]

◆“남자와 구분이 안 돼요”=이상화는 17세였던 2006년 토리노 겨울올림픽에 처음 참가했다. 여자 500m에서 5위를 했다. 국내 여자 스프린터가 워낙 귀했던 탓에 여기저기서 축하의 말이 쏟아졌지만 소녀는 눈물을 보였다. 메달권에 들지 못해 분하다며 더 세지고 더 독해지리라 다짐했다.

이때부터 남자 선수들과 섞이기 시작했다. 한창 예쁘게 꾸미고 싶을 나이였지만 금메달을 위한 ‘몸짱’이 되고 싶었다. 얼음 위에선 남자들을 추월하려 안간힘을 썼고, 웨이트트레이닝 할 때도 경쟁을 했다. 대표팀 맏형 이규혁(32)은 “상화가 역기 드는 걸 보면 여자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무리 놀려도 상화는 끄떡도 않는다”며 웃었다.

이상화는 스쿼트(역기를 들고 앉았다가 일어나는 운동)를 할 때 170㎏까지 든다. 웬만한 남자 선수 수준이다. 김관규 감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여자선수들이 140㎏을 든다더라. 상화는 여자 라이벌들을 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계속 파워를 키웠다”고 전했다.

◆전문가들도 인정한 파워 걸=이상화의 파워는 대표팀에서도 손꼽힐 정도다. 특히 근지구력(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오래 반복할 수 있는 능력)은 남녀 통틀어 최고 수준이다. 이상화는 지난해 체육과학연구원이 측정한 근지구력 테스트에서 75%를 기록했다(측정기로 30회 반복운동 시 1회 때 파워를 100으로 했을 때 마지막 30회째 이상화는 초기 근력의 75까지 유지했다는 뜻). 남자 빙속 대표 이강석(68%)·이규혁(71%)·모태범(73%)보다 높았다.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후반 스피드 유지 능력이 탁월하다는 의미다. 이는 육상 여자 중·장거리 대표 선수(평균 72%)들과 비교해도 높은 편이다. 단거리가 주종목임에도 중·장거리 선수들 못잖은 지구력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출발 때 추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수치인 최고 파워(순간적으로 발휘하는 힘)는 2007년 7.08에서 2008년 7.75로, 2009년 7.98로 대폭 상승했다. 순간적으로 체중의 7.98배 파워를 발휘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스포츠과학에서 7.5 이상이면 최정상급 선수로 분류된다. 또 스피드를 레이스 끝까지 유지하는 능력인 평균 파워(30초 동안 최대 운동 시 발휘되는 힘의 평균) 역시 2007년 6.09에서 2008년 6.70으로, 2009년에는 6.95로 상승했다. 일반 남성(평균 5.5 미만)보다 월등하고, 한국 육상 여자 허들 간판인 이연경(29)보다도 높다. 체육과학연구원 윤성원 박사는 “이상화가 파워에서 볼프를 압도했다. 체력적으로 남자선수 못지않다고 볼 수 있다”며 “근지구력은 본인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말한다. 그동안 흘린 땀에 보상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수퍼맨을 꿈꾸다=서울 은석초등학교 1학년 때 빙상을 시작한 이상화는 휘경여중 시절 이미 고교 선배들을 따라잡았고, 2005년 세계주니어선수권 500m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무대에 데뷔했다. 타고난 체력으로 나이와 성별의 벽을 뛰어넘었다.

토리노 올림픽 이후 이상화는 한국 빙속의 한계, 여자 스프린터의 한계를 넘어서기로 결심했다. 남자처럼 강해지는 게 목표였다. 튼실한 허벅지는 그래서 만들어졌다. 여성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네티즌들은 이상화의 허벅지를 두고 ‘꿀벅지(예쁜 허벅지의 속된 표현)’ ‘철벅지(강철 같은 허벅지)’ ‘금벅지(금메달을 딴 허벅지)’라며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상화는 밴쿠버 겨울올림픽 500m 금메달을 따낸 17일(한국시간) 수퍼맨 로고 모양의 귀걸이를 하고 나타났다. 수퍼맨이 날 듯 빙판 위를 달리고 싶어서 그 귀걸이를 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빙속여제’가 된 날, 팬들은 ‘빙상 위에 이상화(花)가 피었다’ ‘청순한 얼굴이 너무 예쁘다’ 등의 찬사를 쏟아냈다.

생년월일 - 1989년 2월 25일
소속 - 한국체대 (은석초-휘경여중-휘경여고)
주종목 - 500m·1000m
체격 - 1m64㎝·65㎏
취미 - 음악 감상, 컴퓨터게임

2010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우승
2009∼2010 월드컵 5차 500m 3위
2009∼2010 월드컵 4차 500m 2위
2009 겨울유니버시아드 500m 1위
2006 토리노 겨울올림픽 500m 5위

김식·허진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