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남북시대 송년특집] 북한 외교 풍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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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 10월 10일 워싱턴의 국무부 전속 연회 담당 주방장은 특이한 지침을 받았다. 만찬에 김치를 꼭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느닷없는 김치 주문에 당황한 주방장은 워싱턴 한인 식당을 뒤져 김치를 준비하는 데 성공했다.

이날 저녁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북한의 조명록(趙明祿)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위해 베푼 만찬 헤드테이블에 놓인 김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국무부 만찬 테이블에 김치가 올라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이 말을 들은 조명록의 입이 절로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국무부 만찬장에 등장한 김치는 북한이 주력한 전방위 외교의 상징물이다.

올해 북한은 외교 원년(元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대미 외교.북방 외교.국교정상화 외교에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북한의 전방위 외교가 성공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金대통령은 외국 수반을 만나는 자리에선 늘 북한의 국제사회 진출을 도와달라고 강권하다시피 했다.

북한의 북방 외교는 지난 5월 29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중국방문으로 시작됐다.

金위원장은 중국의 장쩌민(江澤民)국가주석과 만나 ▶남북 정상회담▶북.미관계▶북.중관계를 집중 논의했다.

북.러관계도 밀착으로 돌아섰다. 북한은 지난 2월 러시아와 신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7월 19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 북.러관계를 회복시켰다.

북한 외교의 하이라이트는 북.미관계였다. 金위원장은 미국 대선을 코앞에 두고 조명록을 특사로 워싱턴에 파견했다.

조명록은 10월 12일 백악관을 예방, 클린턴 대통령에게 金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북.미 양국은 관계개선 의지를 담은 10.12 공동코뮈니케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10월 23일 평양을 방문, 金위원장과 회동함으로써 양국은 1994년 제네바합의 이래 가장 근접한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현재 클린턴은 부시 당선자의 협의 아래 방북을 준비하고 있다. 방북이 결정되면 웬디 셔먼 대북정책조정관이 평양에 가 사전 정지작업을 할 것이다.

북.일관계는 상대적으로 지지부진했다. 평양과 도쿄(東京)는 지난해 4, 5, 10월 세차례에 걸쳐 수교협상을 했다. 양국은 '관계 정상화' 라는 원칙에는 의견을 같이했으나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는 실패했다.

납치문제와 보상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일본으로부터 쌀 50만t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동국대 강성윤(姜聲允)교수는 "북한이 남한.미국과의 적대관계 해소에 나서고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복원에 노력하는 것은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 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북한은 지난 1월 초 이탈리아와 전격 수교한 데 이어 유럽.아태지역 국가들과도 의욕적인 관계개선을 추진했다.

백남순(白南淳)외상은 지난 9월 유엔에서 유럽연합과 외무장관 회담을 한 데 이어 호주.영국.필리핀 등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캐나다.독일.스페인 등과 차례로 관계를 개선했다.

또 북한은 지난 6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가입, 다자외교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북한의 유럽 접근은 미국 견제와 함께 경제적 실리를 노린 평양 특유의 외교행보로 관측된다.

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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