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정치] 여야 '의처증' 해법은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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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설렘으로 맞았던 2000년도 저물어간다. 설렘은 어느새 허탈감과 불안으로 바뀌고 말았다. 우리 사회 어디를 보아도 제대로 돌아가는 구석이 없는 듯하다. 사회의 큰 틀을 짜야 하는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여당과 야당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의처증(疑妻症)이나 의부증 걸린 사람들 같다. 자민련과 민주당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의처증을 다룬 영화로는 '레드' '블루' '화이트' , 그리고 3부작으로 유명한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십계(十戒). 9' 이 빼어난 편이다.

'십계' 는 십계명의 현대적 해석이라고 할 만한 연작 영화로 폴란드 텔레비전의 적극적 지원으로 이뤄진 20세기의 명작이다.

첫째로 의처증은 자신의 무능력에서부터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십계. 9' 의 남자 주인공 로만(표드르 미할리카)은 심장병 전문의인데 남성클리닉 의사인 친구 미콜라이로부터 치유 불가능한 성불능 진단을 받는다.

아내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고 괴로워할 때 아내 한야(에와 블라칙)가 남편을 격려하며 말한다.

"일주일에 단 5분 배설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예요. 사랑은 마음에 있는 거예요. "

그럼에도 로만은 자신의 무능력으로 인해 아내를 의심하며 의처증에 빠진다. 지금 정부와 민주당은 성불능 진단을 받은 로만과도 같은 처지다.

로만이 자전거로 운동을 아무리 해보아도 어쩔 수 없듯 정부.여당이 아무리 구조조정을 위해 애를 써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

전에는 '억(億), 억' 하더니 요즘은 '조(兆)' 가 보통이다.

정부가 공적자금 10조원을 날렸다고 해도 무감각해져서 그런지, 기가 막혀서 그런지 국민들은 두꺼비처럼 눈만 껌뻑일 뿐이다.

그리고 민주당 대표가 새 인물로 바뀌었다고 해도 불치의 병이 치료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로만의 자전거 타기 정도에 불과하다.

이렇게 무능력 상태에 빠지면 온갖 것이 의심스러워져 여차하면 시비를 걸게 마련이다.

둘째로 의처증에 걸리면 아내 물건을 틈만 있으면 뒤져본다. 로만은 아내의 승용차 속의 박스를 자주 열어본다.

그리고 아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그녀의 가방 속을 뒤지기도 한다. 그러다 물리학과 대학생 것으로 보이는 노트와 전화번호들을 발견한다. 일종의 문건을 찾은 셈이다.

요즈음 여당과 야당이 심심찮게 이상한 문건들을 찾아내 민생을 제쳐놓고 격렬한 어조로 싸우고 있다.

'이회창대선 문건' 이라든지 '선거사범 대책 문건' 같은 것들을 찾아내 열을 올리고 있다.

저쪽에서 저런 문건을 들고 나오니 이쪽에서도 이런 문건을 들고 나오고 하면 정국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하여튼 어디를 뒤지는지 잘도 그런 문건들을 찾아내니 의처증 걸린 로만보다 뒤지는 기술이 뛰어난 편이다.

영화에서는 그래도 아내 한야가 성숙한 편이다. 한야 역시 여자인지라 대학생 마리우스와 한때 정사를 가지기도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추스른다.

영화의 압권은 장롱 같은 데 숨어서 몰래 엿보고 있던 로만이 한야에게 들키는 장면이다. 그 자리에서 한야는 마리우스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있었다.

한야가 엿보고 있는 남편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꼭 껴안으며 "날 붙들어 주세요" 하며 애원한다.

그리고 질투할 권리조차 없다고 낙담하는 남편에게 "당신은 질투할 권리가 있다" 고 다독인다.

한야와 로만의 화해처럼 여당과 야당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대승적 차원에서 그야말로 상생의 정치, 교리(交利)의 정치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조성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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