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경주를 세계 역사도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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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의 성공은 세계화에서 시작됐고 한국의 좌절도 세계화에서 비롯됐다. 이런 때일수록 한국문명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세계화가 다시 시작돼야 한다.

*** 외곽 개발 옛구역은 보존

한국이 세계에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으려면 경주만 한 도시도 없다. 중세는 동양이 서양을 압도하던 시대이고 경주는 당시 세계제국 당나라의 수도였던 시안(西安) 못지 않은 세계도시였다.

천년도시 경주의 역사지도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지하에 묻힌 옛도시의 모습을 모르면서 경주의 오늘과 내일을 말할 수 없다.

옛 경주 한가운데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고 옛 경주의 원형공간이었던 남산과 선도산으로 도시가 확대되고 있다.

지상에서 사라진 천년도시는 지하에 기억장치를 남기고 있으므로 아직은 땅 속에 실재하지만 그 위에 새 도시가 들어서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경주의 역사지도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현 도시의 디지털지도와 위성사진 위에 역사기록과 고고학적 발견을 입력하고 이를 도시구조학의 논리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역사지도를 놓고 현재 진행 중인 경주의 보존과 개발을 생각할 때 '경주 이대로는 안된다' 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필연적 개발수요의 확대는 역사구역의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역사도시들이 살아 남은 사례는 옛 도시구역을 보존하고 도시외곽에 신도시를 만들어 현대도시가 요구하는 개발수요를 신도시에서 수용해 개발과 보존을 공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도시구역의 원상을 유지하고 구도시 외곽에 신도시를 세운 예루살렘, 리도섬과 메스트레를 개발해 옛 도시공간을 보존한 베네치아, 신도시 에우르에 새로운 도시기능을 수용한 로마, 라데팡스 신도심 건설로 구시가지 보존과 신시가지 개발을 함께 이룬 파리, 도시 서측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역사도시를 보존하려 하고 있는 쑤저우(蘇州) 등에는 원래도시의 모습이 남았으나 당대 세계 최고도시였던 시안과 아테네와 이스탄불은 역사도시 위에 신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옛 도시는 부분적 유적으로만 남았다.

경주와 같이 고대도시에서 중세도시로 발전한 파리.런던 등이 당시 경주보다 규모가 작았던 데 비해 도시이기보다 도시국가였던 경주는 오히려 당시의 도시영역이 현 도시영역보다 컸으므로 옛 도시영역의 보존이 더 어려운 것이다.

경주를 역사도시로서 제대로 보존하고자 시도되는 경주 신도시는 그러나 경주만으로는 도시 경쟁력이 없으므로 울산.포항.대구의 통합적 신도시개념이어야 신도시로서 성공할 수 있다.

옛 경주가 형산강 유역에 위치하면서 대구.울산.포항을 어우르고 있었던 만큼 신경주도 대구.울산.포항.경주 네 도시를 모도시로 하는 신도시가 돼야 한다.

*** 인근 대도시와 기능 연계

그러므로 경주는 물론 대구.포항.울산과의 연계를 통해 국제자본의 참여를 유도하는 경북지역의 국제도시가 될 것을 과제로 해야 한다.

신 경주가 세계적 대도시였던 옛 경주의 도시영역 모두를 포괄해 이곳을 중심으로 세계 도시화계획을 이룰 수 있어야 삼국을 통일한 옛 경주의 문명적 복원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일본과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주요 간선이 될 고속철도가 경주 외곽을 지나는 것을 역사유적 훼손이라는 부정적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옛 경주권역의 세계화와 한국 고대문명의 복원을 함께 이룰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신 경주가 네 도시의 국제기능을 담당하는 세계도시가 되고 옛 경주의 주요 역사구역이 발굴 보존돼 되살아날 때 잊혀졌던 천년도시 경주는 세계의 역사도시로 다시 떠오르게 될 것이다.

김석철 (건축가, 베네치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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