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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家를 찾아서] 아산 송악 동화리·배방 신흥리 ‘진주 강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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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송악면 동화2리 동배골의 진주 강씨 은열공파 묘역. 아산시종회 강희식 회장(왼쪽)이 합동제단 앞에서 강노윤 부회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곳엔 아산에 처음 뿌리를 내린 강자해와 그의 후손들이 묻혀 있다.

명문가란 통상 한 집안에서 정치인·관료·학자·기업인 등이 다수 배출된 경우를 말한다. 천안·아산에서 명문가로 일컬을 만한 집안을 소개한다.

글= 조한필 기자, 사진= 조영회 기자

강희복 시장, 강태봉 의장도 은열공파


아산시 송악면에서 예산군 대술면으로 이어지는 616번 지방도의 송악 동화2리 인근. ‘배골’이란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좁은 포장길을 5분여 들어가니 동배골이 나왔다. 이곳에 진주 강씨 묘역이 조성돼 있다. 진주 강씨로 처음 온양에 들어와 산 것으로 알려진 강자해(姜自海,1434~?)와 후손들 묘다. 진주 강씨 아산시종회 강희식(85·아산 방축동) 회장은 “선조들 제사를 일일이 지내기 힘들어 1990년 이곳에 조상님들 합동제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가까운 분토골(송악면 동화2리)엔 강자해의 형인 강자위(姜自渭) 무덤이 있다. 형제는 진주 강씨 중 온양에 처음 뿌리를 내린 입향조(入鄕祖)로 은열공파(殷烈公派)에 속한다. 현재 아산에 사는 진주 강씨는 은열공파가 대다수다. 강희복 아산시장, 강태봉 충남도의회의장도 같은 파다.

은열공은 11세기 초 고려시대 거란족 침입에 맞서 강감찬 장군과 함께 승리를 이끌었던 강민첨 장군을 말한다. 그의 묘는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에 있다.

은열공 10세손인 강자위·자해 형제는 어머니 함양 박씨를 모시고 세종조 무렵 전북 익산에서 온양으로 이주했다. 그후 후손들이 송악·배방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현재 아산시 일대에는 조선시대 관리를 지낸 진주 강씨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일부는 회덕 자운리(현 대전 대덕구 석봉동)서 살다 죽어선 고향 땅에 묻힌 이들이다.

3대가 잇따라 대과 급제

동배골 한쪽 언덕엔 한 집안 3대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묘역관리 건물 회의실엔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과 급제 교지와 당시 답안지가 전시돼 있다. 100년에 걸쳐 문과(대과)에 잇따라 급제한 ‘강세보 3대’다. 지금으로 따지면 국가고등고시 연속 합격자들이다. 장원(1등) 합격자도 나왔다. 강세보(姜世輔,1647~1714)는 34세인 1681년 문과을과 6위로 급제했다. 경기도 죽산군수, 울산도호부사 등을 역임했다. 아들 강일규(姜一珪, 1684~1772)는 1711년 식년사마시 생원 2등 합격하고, 10년 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한다. 사간원 정언·서산현감 등을 거쳐 동지사절단의 서장관(기록담당 벼슬)으로 청에 다녀온 후 병조참의(정3품)에 올랐다.

강일규의 아들 강원(姜垣,1717~1797)은 통덕랑(정5품 명예직)이 됐다가 1780년(정조 4) 문과을과 1위로 급제한다. 63세의 나이였다. 그래서 호가 만향재(晩香齋)다. 늦게 향기를 낸다는 뜻이다. 71세 승지(정3품)가 되고 공조참판(종2품)까지 지냈다.

조선시대 과거(대과) 최종합격자는 33명으로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이다. 즉, 을과 1위는 4등, 을과 6위는 9등 합격자를 말한다. 장원급제는 수석 합격이다. 강세보 3대의 합격 성적은 좋았다.

이곳에 사는 직계 후손 강구서(64)씨는 “이들 3대는 원래 배방읍 신흥리 양지뜸마을에서 대대로 살았다”며 “묘소는 모두 인근 배방읍 회룡리에 있었는데 호서대가 지어지던 1985년 동배골로 함께 이장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모두 강자해의 후손이다.

강씨는 “강자해 어머니인 함양 박씨 친정이 온양에 있어 익산에서 형제를 데리고 이주한 걸로 전해진다”고 말했다

효자로 이름난 진주 강씨들

동화리 분토골엔 강자위와 후손들 무덤이 많다. 함양 박씨 무덤도 그곳에 있다. 효행이 유별난 가문이었다.

청백리 강백년(姜栢年,1603~1681)은 부친 강주(1567~1650)가 죽자 3년동안 송악 궁평리의 묘에서 시묘살이를 했는데 곡하는 시간을 빼고는 오직 예서만 읽었다고 한다.

그의 조부인 강운상(姜雲祥,1526~1587)은 효성이 지극해, 죽어서 영의정 벼슬을 받은 인물이다. 진주 강씨의 회덕입향조인 강문한의 손자로 처음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예의와 겸양에 힘썼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셨는데, 효성이 지극했다. 평소 어머니가 물고기를 좋아해 그는 늘 낚싯대로 물고기를 잡았는데, 비바람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추운 겨울에도 얼음에 구멍을 뚫어 고기를 얻은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조석으로 소리내 슬피 울어 근처의 잔디와 잡초가 다 고사할 정도였다고 한다. 효자·열녀를 기리는 정려문이 세워졌다.

평창군수를 지낸 강봉수(姜鳳壽, 1543~1615)는 강자위 증손자로 온양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부친상을 당하자 죽만 먹으면서 삼년상을 치렀다. 시묘살이 삼년을 하루같이 했다. 마을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를 칭송했다. 홀로 되신 어머니를 극진히 섬겼으며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때처럼 예를 갖춰 상을 치렀다. 1580년(선조 13)에 문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 진산군수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이 된다. 1604년 건강이 좋지 않아 평창군수(종4품)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효행으로 1634년 온양 정퇴서원(靜退書院) 건립 때 위패가 모셔졌다. 1666년 당시 대학자인 송준길의 상소로 왕이 정려각을 세웠다. 그의 묘가 있는 아산시 배방읍 신흥리 감태기(감택)마을에 전해진다.

고관·학자 줄줄이 배출

강운상의 효행 덕분인지 자손들이 번창했다. 강백년과 강학년(둘은 사촌간)의 집안 모두 4대에 걸쳐 대부분 정3품 이상 당상관(堂上官, 조선 고급관리)을 지냈다.

강백년은 1646년(인조 24) 부교리로 있을 때 소현세자비인 강빈(姜嬪)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강빈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파직된다.(강빈은 시아버지 인조의 미움을 사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같은 해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해 동부승지가 된다. 1648년 대사간(정3품)으로 다시 강빈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 청풍군수로 좌천됐다. 1653년(효종 4) 좌승지가 돼 충청도·강원도 관찰사를 거친다. 충청관찰사 시절 김육이 주도한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원활히 추진해 칭송을 받았다. 예조판서(정2품)·판중추부사(종1품) 역임. 그는 시문에 능해 유명한 7언율시를 많이 남겼다.

후손 강언식(70·송악 동화1리)씨는 “무덤은 원래 아산 법곡동에 있었으나 아파트 건설로 10여년 전 공주 의당면 도신리로 옮겼다”고 말했다.

강백년의 아들 강현은 대제학(정2품), 손자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은 한성부 판윤(정2품, 현재 서울시장)을 지냈다. 강세황은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당대 이름을 떨쳤다. 부친 강주도 시문에 능해 『죽창집』를 남겼다. 이조정랑·사헌부 집의(종3품)를 거쳐 인조반정 후 첨지중추부사(정3품)가 됐다.

강운상의 큰 아들은 강첨(姜籤,1559~1611)이다. 대사간·대사헌 그리고 이조참판(종2품)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강학년(姜鶴年, 1585~1647)은 청빈함과 절의로 이름을 날렸다. 1609년(광해군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잦은 병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인조반정(1623년)후 학행(學行)으로 연기현감에 천거됐다. 사헌부 장령(정4품 감찰관)으로 있을 때 공신들에 의한 정치 폐단을 상소했다가 파직된다. 그는 상소문에서 민심 이반, 가혹한 세금, 재정 탕진, 도적 발호, 기강 문란 등을 우려하며 대책을 촉구했다. 그리고 인조반정 이후 당초 약속과 달리 임금의 정사가 덕을 잃고 예를 지키지 않아 조야에 실망을 준다고 크게 탄식했다. 상소 내용이 너무 지나치다는 여론에 은진으로 유배갔다. 1627년 후금이 침입하자 오랑캐와 화의할 수 없음을 상소하기도 했다. 묘는 아산 탕정면 매곡리에 있다.

강학년의 아들 강호(姜鎬,1605~1671)는 1642년(인조 20) 문과 급제, 1655년(효종 6) 장령·헌납을 거쳐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9년 강원도관찰사(종2품)가 됐다. 1671년 부부가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묘는 아산 동화리 분토골에 있다.

강세구(姜世龜,1632~1703)의 묘는 부친 강호와 함께 분토골에 있다. 홍문관 교리(정5품)로 있던 1679년(숙종 5)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해 승지(정3품)·예조참의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한다. 1694년 대사간으로서 왕이 조상묘에 행차하는 능행(陵幸)을 반대하다 파직된다. 또 1701년 장희빈이 죽임을 당할 때 극력 반대하다 함남 홍원 유배 후 병사했다.


은열공 강민첨(姜民瞻, 963~1021)

보물588호 강민첨 영정을 모사한 그림.

진주 출생. 1005년(고려 목종8) 문과에 급제. 47세인 1010년(현종 원년)에 애수진장(隘守鎭將)에 임명돼 그해 12월에 거란군 40만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쳐들어 오자 흩어진 군사를 모아 격퇴시켰다. 1012년 경북 영일 등지에 쳐들어온 동여진(東女眞)을 격퇴했다. 55세때 대장군으로 진급했고 12월 부원수가 돼 상원수 강감찬 장군과 같이 1018년(현종 9) 거란 10만 대군이 침입해 오자 출전하여 흥화진(의주)에서 적을 격파, 큰 공을 세웠다. 거란군이 개경(개성)으로 쳐들어가자 이를 추격, 자산(慈山)에서 대파했다. 개선할때 영파역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다. 그 공으로 식읍 3백호를 받았다. 1021년 11월 58세로 돌아가니 왕이 3일간 정사를 접고 애도했다. 1046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랐다. 시호는 은열(殷烈). 진주·청원·김천 등 사당 배향.

묘는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 산 34에 있다. 이곳에서 음력 10월 5일 씨족들이 먼 조상 묘에 함께 제사지내는 시향제(時享祭)가 열린다. 다음날인 음력 10월 6일엔 아산 분토골 강자위 묘소, 7일엔 동배골 강자해 묘소에서 시향제가 열린다. 옛날 교통수단이 좋지 않을 때 전국에서 모인 은열공파 자손들이 하루 간격으로 이동하면서 조상에게 제사 지냈음을 알 수 있다.


효음(曉吟-새벽에 시를 읊다) 강백년 작

小雨絲絲濕一庭(가는 비가 보슬보슬 온 뜰을 적시는데)

寒鷄獨傍短墻鳴(추위에 떠는 닭만 낮은 담장 가에서 운다)

幽人睡起身無事(묻혀 사는 사람 잠 깨어 일어나 아무일 없어)

徒倚南窓望翠屛(다만 남창에 기대어 푸른 산병풍을 바라본다)

동배골 진주 강씨 묘역 관리건물 회의실에 전시된 강세보(왼쪽 위)와 그의 손자 강원의 과거 합격을 알리는 교지. 교지는 왕이 관리에게 내리는 문서로 관직 임명장 등이 포함된다. 강세보는 경서등을 보는 초시에 합격한 생원으로 과거에 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강희20년은 청 강희제 즉위 20년으로 숙종7년(1681년)이다. 강원은 그의 조부 강세보 등 집안 덕분으로 통덕랑(명예직)이 된 후 과거에 급제한다. 강세보의 과거시험 당시 답안지. 경서 한 구절을 논(論)한 일종의 논문(右)이다. 중국 태고시대 임금인 순(舜)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긴 답안을 작성하고 있다. 여러 번 고쳐 쓴 흔적이 역력하다. 과거 시험장에서 답안 작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주인공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강백년은 시문집『설봉집(雪峯集)』에 시 1500여 수를 남겼다. 거의 7언율시로 수작이 많다.

‘효음’은 한국의 대표 한시로 자주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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