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고려대 농대 세운 고 남석 홍기창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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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지난 14일 경기 연천군 연천면에 있는 선산에서 80세를 일기로 묻힌 남석(楠石) 홍기창(洪基昶) 고려대 명예교수.

고인은 육종학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교과서격인 육종학범론을 편찬하고 고려대 농대를 창설해 수많은 후진을 양성한 농학계의 태두(泰斗)였다.

60여년간 농학에 정진하며 그가 남긴 19권의 저서와 수십편의 연구 논문들은 우리나라 농학의 근대화 과정에서부터 농업정책 수립 및 농기술 발전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지침이 됐다.

특히 후학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았던 그의 빈소에는 제자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 제자만 6백여명에 이른다.

정초만 되면 고아낸 우족(牛足)에 대추 등을 넣어 어묵처럼 만든 '족편' 을 내놓고 제자들과 담소를 즐기던 스승에 대한 마지막 감사의 행렬이었다.

"학교와 학생을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거의 50여년간 학교 근처에서 사실 정도였죠. 아버님에게 학교와 제자들은 삶의 전부였습니다. " 딸 신자(信子.57)씨의 회고다.

그는 1939년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를 졸업했다. 최규하(崔圭夏)전 대통령.고 이영섭(李英燮)전 대법원장.민관식(閔寬植)전 국회의장 등이 그의 동기생들이다.

그는 졸업후 당시만해도 지망자가 드물었던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일본 교토대에서 본격적으로 농학을 전공했다.

"고인은 과학에 대한 불타는 정열과 낙후된 국내 농학에 대한 가슴깊은 애정 때문에 농학을 선택했을 것" 이라고 閔전의장은 전했다.

그는 고 우장춘(禹長春)박사.유달영(柳達永)서울대 농대 명예교수 등과 함께 초창기 농학계를 이끌었다.

고려대 농대를 창설하게 된 것은 53년 대구 피난 시절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선생의 권유를 받아들인 결과다.

'농업이 국가의 초석' 이라는데 뜻을 같이한 두 사람은 농대 설립에 들어갔다.

변변한 농학 전공자가 부족했던 그 시절 농대 창설은 '무에서 유' 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농학교를 나와 경남 진주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을 데려와 원예과에서 과수에 대해 가르치게 할 정도였다. 이런 고인의 열정에 힘입어 고려대 농대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제자들에겐 늘 관대했지만 스스로에게는 엄격했던 고인은 스스로 연탄을 갈아가며 불을 땔 만큼 원로교수 답지 않은 소탈한 면모를 보였다.

고인이 차지했던 '큰 자리' 를 추모하며 제자인 강병화(姜炳華)고려대 식량자원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계셨기에 농대가 있을 수 있었죠. 그런데 올해 농대가 농학계열에서 이학계열로 흡수됐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발전적 해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선생님이 자신의 손때가 묻은 농대가 흡수된 사실을 모르고 돌아가신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속이나 한 듯 선생님과 농대가 함께 사라진 것 같습니다. "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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