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5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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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50. 우연한 인체실험

도호쿠의대 실험실의 쥐 50마리를 표본추출 후 혈청검사를 해보니 90%에서 서울바이러스에 감염돼 있었다.

이 때문에 이곳 실험실 쥐 1천여 마리가 한꺼번에 도살됐다. 일본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지금까지 일본 의과대학 실험실을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했던 괴질이 모두 서울바이러스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79년 센다이에서 열린 유행성출혈열 학회장에선 일본의 거의 모든 신문사와 방송사 기자들이 필자 곁을 에워싸고 취재경쟁을 벌였다.

이때 기억나는 것은 자존심 싸움이다. 당시 학회를 주도했던 도호쿠의대 학장인 이시다교수가 나에게 보낸 초청장에서 유행성출혈열을 당시 학계에서 통용되던 '한국형 출혈열' 대신 '조선(朝鮮) 출혈열' 로 명기한 것이 아닌가.

알다시피 조선은 한국이란 정식 국호를 무시한 표현으로 일본인이 한국을 얕잡아 볼 때 흔히 사용한다.

나는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를 바로 잡아줄 것을 요구하는 항의편지를 썼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공식용어로 한국형출혈열을 쓰겠다고 밝혔다.

그는 수면 아래 감추어졌던 일본 대학병원 실험실의 괴질을 처음으로 제기한 장본인이다.

이처럼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이시다학장의 결단으로 도호쿠의대 괴질이 규명되자 일본의 다른 대학병원에서도 쉬쉬하며 감췄던 사례들을 공개했다.

필자가 당시 일본내 19개 의대 연구소를 조사해보니 모두 1백25명의 환자가 발생했으며 이중 1명이 사망했다.

사망한 사람은 홋카이도의대 교수로 실험실 쥐로부터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됐으나 감기쯤으로 가볍게 여긴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스키를 타러 갔다가 쇼크에 빠져 사망했다. 이것은 유행성출혈열에 걸려도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는가를 가늠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도 무리하지 않고 푹 쉬면 며칠 고생하지만 대개 생명은 건질 수 있다. 그러나 과로나 스트레스 등 무리하면 치명적이다.

장교와 사병의 차이점을 따져보면 알기 쉽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 천명의 군인 감염자를 보았는데 대개 사병이 걸리면 죽지 않지만 장교가 걸리면 죽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사병이야 몸이 아프면 군의관에게 말하고 쉴 수 있지만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장교는 몸이 아파도 무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 실험실에서 감염된 사람 중에서도 실험을 직접 도맡아 강행군을 해야하는 연구원들이 훨씬 심하게 앓았다.

고려대 생물학과 출신으로 당시 내 연구를 맡았던 송모 조교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된 사실을 모르고 처음엔 감기인 줄만 알았다.

그는 고열 등 몸살증세가 나타났지만 우직하게도 실험을 계속했으며 심지어 증상이 나타난 지 사흘 뒤에는 결혼까지 했다.

그래서 제주도까지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죽다 살아났지만 덕분에 당시까지 베일에 갇혀왔던 의문점을 풀 수 있었다. 완쾌 후 그의 혈청에선 바이러스 양성반응이 나왔지만 그의 처는 음성반응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내라면 환자와 가장 가깝게 생활하는 사람이 아닌가. 더구나 그의 처는 송군이 유행성출혈열인지 모른 채 일상적으로 대했을 것이다.

이는 유행성출혈열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감염되진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히 일상생활은 물론 키스나 성교를 통해서도 전염되지 않는 것이 송군의 우연한 인체실험 덕분에 입증된 것이었다.

송군은 현재 학문의 꿈을 접고 미국에서 세탁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특유의 성실성 때문에 서넛 이상의 세탁체인을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이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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