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세상 탐사] 한반도 드라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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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호 02면

주한 중국대사의 행사는 붐볐다. 지난 8일 소공동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청융화(程永華) 대사의 이임 리셉션이 있었다. 500여 명이 모였다. 대사는 입구에서 손님을 맞았다. 대사와 악수하는 줄이 30m 이상 늘어섰다. 시작이 15분쯤 늦어졌다. 외교 소식통은 “중국 대사관의 대외적 모임은 갈수록 활기차고 북적댄다. 서울 외교가에서 최고의 흥행카드다. 미국대사관 행사에 못지않게 거창하다”고 말했다.

중국의 대외적 자세도 이미 바뀌었다. 덩샤오핑 시절 도광양회(韜光養晦· 때를 기다리면서 실력을 키운다)의 몸 낮춘 태도가 아니다. ‘할 말은 한다’(有所作爲·유소작위)는 기세로 바꿨다. 미국의 대만 무기 수출 문제를 둘러싼 갈등에서 실감난다. 지난해 10월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북한 방문 때다. 변모의 상징적인 장면이 있었다. 그는 평양에서 100㎞ 떨어진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 능(陵)’(평남 회창군)을 찾았다. 그곳에 6·25전쟁 때 전사(28세)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毛岸英)묘지가 있다. 그 앞에서 원자바오는 “조국은 강대해졌습니다(祖國現在强大了). 인민은 행복해졌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발언 내용은 이례적이었다. 한반도에서 중국의 실력과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의지의 표시로 비쳤다. 9일 평양 방문을 끝낸 왕자루이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의 귀국길에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동행했다. 그 모습은 북한에 대한 중국의 특별한 영향력을 실감나게 표출했다.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威海). 인천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 항구다. 항구 앞 섬(劉公島)은 19세기 말 청나라 북양함대 기지였다. 그곳에 청일전쟁(중국은 갑오전쟁) 박물관이 있다. 침몰한 기함인 정원(定遠)의 거대한 닻이 복제돼 있다. 북양함대 수사제독(水師·사령관) 정여창(丁汝昌)의 동상과 사당이 있다.

북양함대와 일본 연합함대의 하드웨어 쪽 전력 차이는 적었다. 그러나 청나라 지휘관의 전술과 전투 의지는 형편없었다. 개전 7개월쯤 뒤인 1895년 2월 함대는 굴욕적인 패배를 했다. 제독은 항복하지 않고 자결을 택했다. 사당은 죽음의 장렬함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2월, 4월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전쟁의 참패로 중국은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속령처럼 다뤘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상실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1985년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패배의 치욕을 전시하고 있다. 후진타오 주석, 장쩌민 전 주석이 그곳을 찾았다. ‘전국 청소년 교육기지’라고 쓴 장쩌민의 휘호도 있다. 그곳은 동북아의 제해권을 겨냥한 각성과 열정을 길러낸다. 21세기 중국 해군력의 성장은 비약적이다. 동아시아의 군비 경쟁을 재촉하고 있다.

2월의 한반도 해상은 미묘하다. 9일 인천 소월미도 앞바다에서 추모제가 있었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의 연례 행사다. 우리 해군이 지원한 초계정 위에서 콘스탄틴 브누코프 대사는 묵념했다. 1904년 그날 일본 함대의 기습으로 러일전쟁은 본격화했다. 그 바다에서 러시아 함정 2척은 일본 함정에 포위됐다. 함장과 수병들은 항복하지 않고 폭파 자결을 택했다. 러시아 대사는 “불공정한 싸움에서 우리 장병은 용기를 발휘해 영웅적으로 싸웠다”고 말했다. 한반도에 얽힌 좌절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부끄러운 과거의 유산과 기억을 부수고 묵살하는 우리 문화 풍토와 다르다.

한국은 그 시절의 초라함과 거리가 멀다. 부국강병의 성취를 이뤄냈다. 1일 우리 해군은 기동 전단을 창설했다. 대양해군으로의 발진이다. 한국은 주변 강대국들과 친해야 한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은 선린(善隣)의 열린 자세를 요구한다. 폐쇄적 민족주의를 거부한다. 하지만 선린은 힘이 있을 때 돋보인다. 국력의 뒷받침 없는 선린 외교는 유약하다. 동북아 정세는 늘 요동친다. 한반도는 세계사의 역동적 드라마를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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