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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 책 읽던 트럭 운전사의 상상력에 세계가 열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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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호 12면

지난달 1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15회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드 시상식장에서 제임스 캐머런 감독(왼쪽)이 그의 전 부인이자 영화감독인 캐서린 비글로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는 촬영상,미술상,편집상,시각효과상,음향상,액션영화상 등 6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AP=연합뉴스]

1997년, 제작 기간이 초과되면서 제작비가 3억 달러로 불어난 ‘타이타닉’은 20세기폭스의 골칫거리였다. 60년대,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하여 할리우드의 몰락을 부추긴 서사극 영화들의 재판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제임스 캐머런의 유일한 실패작 ‘어비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북미 6억 달러, 전 세계에서 16억 달러를 넘게 벌어들였고 제임스 캐머런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친 것처럼 ‘세계의 왕’이 되었다. 이후 ‘매트릭스’도 ‘반지의 제왕’도 ‘해리 포터’도 넘보지 못했던 대단한 기록이 드디어, 경쟁자가 아닌 캐머런 자신에 의해 깨졌다. 11년 만에 3D 영화 ‘아바타’로 돌아온 제임스 캐머런은 이제 세계의 왕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신이라고 부를 정도가 되었다. 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그런 ‘초월’이 가능한 것일까?

B급 영화 감독에서 신의 손으로 …‘아바타’ 감독 제임스 캐머런

완벽한 이미지 위해 전쟁에 임하듯 몰입
제임스 캐머런의 출세작 ‘터미네이터’가 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거 재미있네라고 웃어넘겼겠지만 캐머런은, 그 몽상을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 매달렸다. 거의 미친 사람처럼, 캐머런은 머릿속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타이타닉’을 찍기 위해서 제임스 캐머런은 직접 다이빙을 하고, 잠수정에 타서 가라앉은 타이타닉호를 지켜보고, 35㎜ 원격 조종 카메라로 1등실 승객 전용식당이나 연회장의 벽난로 등을 모두 확인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영화 속에 고스란히 재현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이, 자신이 만들어내고 싶은 세계를 완전하게 창조하는 것이 제임스 캐머런의 목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고 잠시 쉬어가기 위해 ‘쥬라기 공원2’를 만들었다고 했지만, 영화 만들기를 전쟁처럼 치르는 캐머런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트랜스포머’의 마이클 베이도 다혈질의 폭군으로 악명이 높지만, 제임스 캐머런은 그 이상이다. 욕설과 고함은 일상 다반사고, 스태프가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소홀하면 바로 해고다. 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모든 것에 뛰어든다. 조명을 설치하고, 소도구를 옮기고, 배우에게 분장까지 한다. 함께 일을 해본 동료들은 “캐머런이 신사처럼 행동하는 모습만큼 신기한 것은 없다. 그가 가장 행복할 때라면 아마도 한 장면을 완벽하게 찍어냈을 때일 것”이라고 말한다.

네 번의 결혼과 이혼도 그런 연유다. 캐머런의 친구이기도 한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나는 당신 아내다. 내게 아내 대접을 하라고 캐머런에게 요구하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치열한 전쟁터 한가운데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서 ‘여보 나 사랑해?’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에게는 그런 사랑 타령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프로듀서 게일 앤 허드,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 배우 린다 해밀턴 등은 아내라기보다 동료였고, 영화를 만들면서 만나 ‘전우애’를 다지다가 평화가 도래하면 이혼하기를 거듭한 게 아닐까. 다행히도 ‘세상의 왕’이 된 후 다섯 번째로 결혼한 수지 에이엄스(‘타이타닉’의 배우였던)와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지만.

영화광이 아니라 현실주의자
‘스타 워즈’의 조지 루커스, ‘반지의 제왕’의 피터 잭슨, 스티븐 스필버그와 달리 제임스 캐머런은 영화광이 아니었다. 1954년생인 제임스 캐머런은 독서광이고 특히 SF에 열광했다. ‘공상과학소설을 읽다 보면 시각적 상상력이 발달한다. 글 속에 표현된 것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이다. 잡지책이나 드라마, 만화책에서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훈련을 하던 캐머런은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보면서 자신이 떠올렸던 이미지가 영화 속 장면으로 만들어졌음을 실감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장면들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고심한다. 즉 철학이나 의미 이전에 이미지 자체에 매혹되고, 재현의 테크놀로지에 몰두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싹은 보였다. ‘고질라’ 시리즈에 열광했던 어린 캐머런은 영화를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모형 탱크, 비행기 등으로 미니어처를 만들어서 8㎜ 카메라로 찍었다. 대학 물리학과에 들어갔지만 중퇴한 캐머런은 트럭 운전사로 일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마침내 B급 영화의 전설인 로저 코먼의 휘하에 들어간다.

B급 영화는 제작비도 적고 촬영 기간도 짧다. 제약이 많다는 것은 역으로 더 많은 아이디어가 발휘된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다. 감독 데뷔작인 ‘피라냐2’(1981)를 찍은 캐머런은 자신의 이미지가 B급영화에서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터미네이터’(1984)의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자인 게일 앤 허드를 찾아간다. ‘터미네이터’의 속편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단 1달러에 넘길 테니 자신을 감독으로 기용하라고 요청했다. ‘터미네이터’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어서 연출한 ‘에이리언2’도 걸작이었다. ‘어비스’는 실패했지만 ‘터미네이터2’로 ‘속편의 제왕’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그리고 ‘트루 라이즈’ ‘타이타닉’을 거쳐 ‘아바타’에 이르게 된다.

"나는 작품 아닌 상업영화 만든 것"
제임스 캐머런은 ‘타이타닉’으로 감독조합상을 받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작품(film)이 아니라 그저 상업영화(movie)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 상을 주는 걸 보니 이번엔 내가 부주의하게 작품을 만들었던 모양”이라고 자조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여전히 ‘아바타’에 대해서도 표절이라느니, 스토리가 ‘바보’라는 비난들이 허다하다. 하지만 제임스 캐머런은 그저 관객이 현혹되는 오락영화를 만드는 감독에 불과한 것일까? 제임스 캐머런은 최고의 기술로, 최상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이전까지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신천지다. 다만 그건 작가정신이 아닌, 장인정신이 빚어낸 현존 최고의 스펙터클이다. 제임스 캐머런은 테크놀로지라는 붓으로 새로운 화법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감독인 것이다.

제임스 캐머런의 영화가 뻔하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그의 영화에서 보이는 선악의 투쟁과 희생적인 사랑은 너무나 고전적이고, 너무나 일반적인 주제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평면적이고, 그들의 고뇌도 단순하다. 하지만 캐머런은 ‘시스템에 관해서는 비관적, 개인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라고 믿는 인간이다. 그래서 시스템에 저항하는 개인이 결국 승리하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다고 ‘터미네이터’부터 ‘아바타’까지 일관되게 외치고 있다.

즉 캐머런은 심오함보다 통속적인 우직함으로 관객을 감동시킨다. 캐머런은 영화광도 아니고, 흔히 말하는 지식계층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수많은 통속소설과 영화에서 자신의 철학을 다듬었다. 희생적인 사랑과 테크놀로지의 정당한 사용이라는,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진리 말이다.

또한 제임스 캐머런에게 ‘아바타’는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영화가 아니다. ‘타이타닉’을 만든 후 제임스 캐머런은 결코 놀지 않았다. 제시카 알바를 스타로 만든 드라마 ‘다크 엔젤’을 만들었고, 바다를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심해의 유령’과 ‘에이리언 오브 더 딥’을 찍었다. 프랑스에서 꿋꿋하게 오락영화 일변도로 나아가는 뤽 베송과 마찬가지로, 제임스 캐머런 역시 ‘바다’에 대한 애정 아닌 강박이 넘치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 구상했다는 ‘어비스’는 바다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을 드러내는 동시에 ‘타이타닉’과 ‘아바타’의 원점이라고 볼 수 있다. ‘어비스’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비판적인 지지, 자기희생을 통한 세계의 구원이란 주제는 ‘아바타’까지 관통한다. ‘아바타’가 온통 푸른 색조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3D는 현실감 주기위한 도구
‘아바타’는 첫 3D영화가 아니다. ‘폴라 익스프레스’ ‘베오울프’ ‘크리스마스 캐롤’ 등을 만든 로버트 저메키스처럼 제임스 캐머런이 꾸준하게 3D 작업을 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이전까지의 3D 영화들이 어떻게 하면 입체라는 것을 이용해 관객을 놀라게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캐머런은 자신의 이미지를 중심에 두고 3D를 활용했을 뿐이다. 즉 3D 효과를 높이기 위한 이미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머릿속의 이미지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해 3D를 끌어들인 것이다. 평면보다는 입체가 더욱 더 리얼하기 때문에, 캐머런은 3D를 선택했다. 캐머런의 모든 영화가 이미 말했듯이,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다. 3D는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임을 캐머런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바타’가 극단적인 장인정신의 산물임은 분명하다. 관객을 위한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이미지를 현실로 만들어내려는 강박적인 욕망이 ‘아바타’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 욕망에는 분명한 시대정신이 있다. 인터넷 시대가 된 21세기에는, 더 이상 가상의 리얼리티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리얼리티를 느끼게 하는 비현실이 아니라, 비현실 자체도 하나의 리얼리티로서 작용하는 것이 21세기의 양상이다. 그런 점에서 3D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제임스 캐머런은 3D가 더 이상 신기한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적인 이미지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현실을, 대중에게 익숙한 스토리에 원숙하게 담아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신제품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최상급의 하드웨어가 아니라, 대중의 욕망을 담아내고 끌어내는 소프트웨어인 것이다. 제임스 캐머런은 그 테크놀로지를 너무나도 잘 다루는 장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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