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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아닌 학문 홍보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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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대학마다 열띤 학교 홍보에 나선다. 입시설명회 자리에 스타급 졸업생들이 동원되고, 거창한 학교 비전과 졸업생 취업 현황이 현란한 그래프로 포장돼 제공된다. 연예인 재학생들이 라디오나 신문 광고에 얼굴을 내미는 것도 이맘때 가장 극성이다.

학과 단위로 홍보를 하는 학교도 많다. 지방 중.고등학교에 찾아가 신기한 과학 실험을 보여주며 우리 학과로 오라고 손짓하는 데도 있고, 스타급 교수들이 지방을 돌며 강연회를 열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홍보가 하나 빠져있다. 바로 학과가 아닌 '학문'에 대한 홍보다. 도대체 '물리학'이란 분야는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이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원대한 연구 목표는 과연 무엇인지, 내가 그 분야를 전공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우게 되는지, 진학을 앞둔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고3 때 대학지원서를 쓰면서 다들 경험하지 않았던가? 학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없이, 그저 학과 이름이 주는 막연한 이미지나 고등학교 때 배운 교과목의 연장선상에서 적당히 추측해서 지원학과를 정했던 것을 말이다.

생물학과와 생명과학과, 생물공학과는 어떻게 다른 걸까? 물리학과와 화학과, 재료과학과는 나노과학을 접근하는 방법이 어떻게 서로 다른가? 우리나라에서 법의학을 공부하려면 어느 학과로 가야하며, 졸업 후엔 어디서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걸까? 대학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정보는 바로 이런 것들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정보를 학생들은 어디에서 얻으란 말인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한 후에 '전공 학과를 바꾸고 싶다'는 의견이 굉장히 높은 이유도 막상 수업을 들어보니 내가 생각했던 학문이 아닌 데에 있다.

이제 과학자들은 자기가 몸 담고 있는 대학을 홍보하는 데만 열을 올리지 말고, 명석한 학생들이 우리 분야에 들어와 함께 훌륭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그리고 학생과 학부모가 우리들의 연구 분야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질 수 있도록 중.고등학생들을 만나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이런 일은 학부제가 실시된다고 해서 늑장부려도 될 일이 아니며, 오히려 이과와 문과 사이에서 갈등하는 고1 학생들부터 만나야 한다. 인간의 두뇌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생물학과 진학을 위해 이과에 가야할지, 심리학과 진학을 위해 문과에 가야할지 고민하는 학생들도 있으니 말이다. 특히 나노과학이나 신경과학 같은 학제간 연구분야나, 생물정보학이나 바이오시스템학 같은 신생학문은 더더욱 '학문 홍보'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학문 홍보는 '학회'가 주체가 돼야 한다. 미국신경과학회에선 뇌 연구가 얼마나 중요하고 흥미로운 학문이며, 이 분야에 입문하면 어떤 연구를 하게 되는지 알려주려는 노력을 굉장히 많이 한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청소년들에게 인간 두뇌의 경이로움을 맛보게 하기 위해, 학회는 중.고등학생들에게 뇌 연구를 소개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직접 실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실험 키트도 개발했다.

학생들뿐 아니라, 교사를 연수시키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교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가 학생들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학과를 정하는 것은 인생에서 처음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다. 이렇게 중요한 결정에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학자나 학생들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하는 학문 분야가 사람들 머릿속엔 그저 수능점수에 맞춰 일렬로 늘어선 대학배치표 속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은 정말 소름끼치도록 싫다.

정재승 KAIST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