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33) 길고 긴 고난의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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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발발 뒤 미국 군사고문단의 일부는 철수 명령에 따라 한국을 떠났다. 고문단 일부 병력이 1950년 6월 27일께 선박 편으로 이동하기 위해 행군하고 있다. [중앙포토]

임진강 철교, 저 다리를 언제 끊어야 할까. 우선 상황부터 점검했다.

장치은 공병대대장을 불렀다. “유사시에 다리를 폭파할 준비는 했나”라는 물음에 그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임진강 북쪽으로는 아직 12연대 병력 3000명이 남아 있다.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내게 ‘럭키스트라이크’ 담배를 건네줬던 로이드 로크웰 중령이 그때 느닷없이 작별인사를 해왔다. “미 군사고문단(KMAG)에서 미군 군사고문들에게 모두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군사고문단이 철수한다면 그들에게 무기와 장비 등을 의존하는 국군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한국을 지키기 위해 왔다면서 가장 위급한 순간에 철수명령을 내린 군사고문단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나에게 다시 짙은 불안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미군이 빠지는 전쟁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임진강 다리를 지켜보면서 엄습했던 불안감이 몇 배는 더 커진 상태로 밀려 왔다. 눈물은 여러 종류다. 기쁠 때와 슬플 때, 그리고 불안감이 마구 커져 감내하기 어려울 때도 그 눈물이 나오는가 보다. 서울 쪽으로 돌아가는 로크웰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문산의 13연대 쪽으로 갔다. 임진강에서 제법 큰 도섭장(渡涉場)이 있는 고랑포였다. 김익렬 대령이 이끄는 연대는 그래도 선방을 하고 있었다. 적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시흥으로 교육을 떠나기 전인 5월께 파 놓았던 진지가 있다. 파평 윤씨의 대종(大宗)이 모여 사는 파평산 자락이다. 적들이 임진강을 넘어 올 경우를 상정해 미리 파 놓은 주방어 진지였다. 개인 참호를 먼저 파고 그들을 잇는 교통호로 연결했다. 지역의 주민들과 인근 중학교 학도호국단 학생 1000여 명을 동원해 미리 파 놓은 참호였다.

참호들을 먼저 둘러보려고 산을 올랐다. 그러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려 애를 썼지만 이 겪어 보지 못한 전쟁 앞에서 나는 아직 떨고 있었던 것이다. 참모와 부관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애써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다행히 이들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1950년 4월 말 내가 1사단장에 부임한 뒤로 살펴본 사단 작전 지역과 방어선 배치는 그리 적절하지 못했다. 옹진반도 동쪽으로부터 문산까지 이어지는 38도 선상의 방어선은 직선거리로 90㎞였다. 너무 넓었다. 사단 병력을 모두 집중적으로 동원해 1선 방어에만 치중하다 적에게 뚫린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가 나올 것이다. 나는 깊이, 종심(縱深)을 생각했다. 적이 침범해 오는 주접근로(主接近路)를 상정해 길목을 여러 겹으로 지키는 게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적의 침공 시에는 개성에서 최대한 지연전을 펴다가 임진강 남쪽 문산리와 파평산, 적성을 잇는 주저항선에 와서 다시 적을 저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서 파놓은 참호였다. 나는 상황 발생 시 각 부대는 즉시 미리 구축한 자기 진지에 들어가 방어에 임하도록 지시했다.

오후 3시쯤 다시 임진강 철교 앞으로 갔을 때다. 저 멀리서 스리쿼터 두 대가 넘어오고 있었다. 12연대를 이끌었던 전성호 대령의 차량 행렬이었다. 그러나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리 위를 달려오는 차 위의 전성호 대령 얼굴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차들이 다리를 넘어 왔다. 그들 중 일부가 “후퇴하다 차 사고를 당했다”고 설명했다. 전 대령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를 후송시켰다. 개성은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12연대를 이끌던 연대장이 피를 흘리면서 저렇게 먼저 임진강을 건넜다.

개성은 이미 밀려 연대 병력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이 주저항선에서 최대한 적의 남침을 저지하는 일밖에 없었다. 13연대 병력이 임진강을 넘을 무렵 다리 폭파를 지시했다. 철교 북쪽 입구에서 다리를 경비하던 수용(收容)부대가 “적이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다리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기다렸던 굉음은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전선 코드가 끊어진 것 같다”고 외쳤다. 다리를 폭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적이 다리 건너편에 나타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횡액은 겹으로 닥친다(禍不單行)’고 했던가. 다행히 아군이 가장 두려워했던 탱크는 보이지 않았다. 다리는 당연히 끊어졌을 것이라고 적들이 판단한 모양이다. 그날 오후 적 탱크는 우측 13연대 고랑포 방향으로 공격해 왔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백선엽 장군

◆참호(塹壕)=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파는 일종의 구덩이다. 크게 개인호와 교통호 두 종류가 있다. 개인호는 전투원 1~3명이 들어가 적의 총격이나 포격 등을 피하면서 반격할 수 있게끔 조성한다. 보통 적이 오는 길목 등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만든다. 대개 일반인의 키 높이, 또는 그보다는 다소 작은 깊이로 판다. 교통호는 개인호를 잇는 구덩이다. 개인호와 개인호의 부대원이 이동할 수 있도록 판다. 높이는 개인호와 비슷하다. 중대 또는 소대급의 최전방 전투부대가 적의 공격을 조직적으로 막기 위해 만든다. 개인호에는 구덩이를 판 뒤 흙과 모래 등이 든 마대 또는 포대 등을 위에다가 쌓는 게 일반적이다. 참호를 효율적으로 사용한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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