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안락사 소회(所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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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이가 좀 든 사람 치고 늙음과 큰 병에 이르렀을 때를 걱정해 보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교통사고.병.죽음 자체는 그리 무섭지 않다.

남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폐를 끼치기가 싫다. 고양이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숨는다고 한다.

나도 고양이처럼 병들어 죽는 장면을 남기고 싶지 않다. 시체도 보이지 않고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다.

네덜란드 하원은 불치병 환자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불치병이 분명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고, 환자가 자발적으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밝히는 상태에서 의사가 동의한다면 안락사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가톨릭계와 생명권리를 중시하는 이들은 저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생사해탈을 목표로 삼는 불교는 어떤 입장일까. 생명의 권리를 중시하는 면에서는 원칙적으로 가톨릭계의 입장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병과 죽음을 소화하는 면에서는, 불교가 무조건 삶 쪽에만 무게를 두지는 않는다.

춘성선사는 법상에서 욕설 법문을 잘 하기로 유명했다. 염불도 잘해 불공을 할 때는 목소리가 사찰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무애를 주장하면서도 계율이 청정해 큰 도인으로 추앙받았다. 그가 중병에 걸렸다. 화계사에서 누워 있을 때 학인들이 문병을 갔다.

병세를 묻자 그는 "아파 죽을 지경" 이라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약을 복용했지만 뒤에 암이라는 것을 알고 모든 약과 음식을 끊었다.

당시에 암은 불치병이었다. 그는 단식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신앙심이 깊은 불교인들 가운데는 저 고승처럼 노환이나 중병으로 쓰러졌을 때 병원으로 옮기지 말라고 유언을 하는 이들이 많다.

육신의 노쇠 속도와 정신이 흐려지는 속도는 어느 쪽이 더 빠를까. 사람들은 흔히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먼저 늙어 가는 것 같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정신 수련을 하지 않으면 몸이 멀쩡해도 판단력이 흐려지기 쉽다. 특히 삶의 무대에서 내려갈 때를 잘 모르는 것이다.

정신이 건강할 때는 병원으로 갈 것이냐 말 것이냐, 언제쯤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 할 것이냐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주변을 정리한다.

그러나 노망까지 가지 않더라도 상황 관찰력이 둔해지면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 수년 후에 벌일 사업을 계획한다.

불치병에 걸리고 고통이 끊어지지 않더라도 사람이 죽음을 결심하기는 쉽지 않다. 고통이 없을 때는 맑은 정신으로 죽음을 맞이할 힘이 있지만 병이 들고 죽음이 임박함을 느끼면 더욱 살고 싶어 한다.

허나 살겠다고 매달릴 때는 진통제에 의지해서라도 아직 고통이 견딜 만한 상태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있고, 그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 살겠다는 이가 있다면 그는 전생의 업을 믿는 사람이다. 가능한 한 오래 고통을 견딤으로써 전생의 악업을 더 많이 녹이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안락사 문제를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불치병에 걸렸을 때 의연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나, 고통을 견디며 오래 살아 다겁생의 악업을 녹이겠다고 하는 것, 두 쪽 다 용기있는 결단이다.

또 있다. 환자 본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말고 당당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보살피는 우리는 환자가 주변에 폐를 끼치는 것이 미안해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 없도록 제반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석지명 <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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