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 아픈 기억, 낼모레면 ‘졸업’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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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늘푸른자립학교의 아이들은 요즘 클라리넷 연주와 연극 연습으로 바쁘다. 11일 있을 졸업식 때 자축파티에서 선보일 공연을 위해서다. 은영이가 학교 친구 지수를 위해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4일 오후 1시 서울 서교동의 한 주택가. 2층짜리 양옥에 들어서자 음악소리가 들렸다. 졸업식에서 흔히 부르는 스코틀랜드 민요 ‘작별’이다. 방에서 붉은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한 소녀가 클라리넷을 불고 있다.

“4개월 넘게 배웠는데도 아직 서툴러요.”

은영이(17·가명)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수줍음을 타는 앳된 모습의 고등학생이다. 학교의 간판은 ‘서울시 늘푸른자립학교’다. 그러나 정식 고등학교가 아니다. 성매매 피해 10대 소녀를 위한 단기 학교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학교는 11일 첫 졸업식을 앞두고 있다. 18명의 소녀가 졸업을 자축하며 작은 공연을 열 예정이다. 아이들은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직접 쓴 대본으로 연극을 선보이기 위해 연습하고 있다.

은영이의 기억 속 아버지는 늘 화가 나 있었다. 전국의 공사장을 떠돌며 일하다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손찌검을 했다. 설거지와 방 청소를 안 한다고 은영이의 배를 걷어찼다. 아버지의 말을 무시한다고 은영이는 선풍기로 머리가 찢어지도록 맞았다. 두 살 때 돌아가신 친엄마에 대한 기억은 없다. 6개월이 멀다 하고 바뀌는 새 엄마에 대한 기억뿐이다.

2007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은영이와 말다툼을 한 아버지는 “다녀와서 보자”며 집을 나갔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은영이는 공주시의 집을 뛰쳐나왔다. 3년이 넘는 가출 생활의 시작이었다.

중학교 2학년 은영이는 친구 집과 가출 청소년을 위한 중·단기 임시 보호시설인 ‘청소년쉼터’를 전전하며 전국을 헤맸다. 그러다 대구의 쉼터에서 한 언니를 만났다. 언니의 제안으로 은영이는 쉼터를 나와 부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만난 또래 아이들과 고시원 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PC방·고깃집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다. 어느 날 한 언니가 “쉽게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겠다”며 즉석만남을 제안했다. 은영이는 “아빠보다 더 소중한 언니들이 시키는 일을 거절할 순 없었다”고 말했다. 메신저를 통해 만난 30~40대 아저씨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했다. 한 번에 10만~15만원을 받았다.

2008년 10월, 은영이의 손목에 은색 수갑이 채워졌다. 메신저 채팅으로 만난 아저씨가 경찰이었다. 온몸의 신경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다행히 초범이어서 훈방조치로 풀려났고 ‘또래포주’의 집에서 도망쳤다.

서울로 올라온 은영이는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지만 성매매의 기억을 떨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알고 ‘더럽다’며 손가락질할까 봐 두려웠다. 그사이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쉼터에서 툭하면 친구를 때렸고, 그곳을 뛰쳐나와 방황했다.

지난해 9월 은영이는 성매매 피해 10대 소녀를 위한 장기보호시설인 서울 구로구의 ‘새날을 여는 청소년쉼터’에 입소했다. 오랜 가출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쉼터에서 서울시가 운영하는 ‘늘푸른자립학교’를 소개받았다. 은영이는 1기생으로 입학해 비슷한 상처가 있는 친구를 만났다. 그토록 입어 보고 싶던 빨간 체크무늬 교복도 생겼다.

은영이는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다. 오전에는 중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오후에는 성교육, 경제교육, 자립을 위한 직업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를 선생님과 함께 만나기도 했다. “얼마나 힘드셨느냐”는 선생님의 말에 예순 살의 아버지도 무너졌다. “이제 네가 내 마지막 희망”이라며 아버지는 조심스레 은영이의 손을 잡았다. 부녀는 함께 울었다.

은영이는 내년부터 고등학교에 다니기로 결심했다. 꿈도 생겼다. 고등학교 졸업 후 유기견을 보살피는 애견 미용사가 되기 위해 학원도 다닌다. 은영이는 “옛날에는 과거 생각에 잠 못 이뤘는데 이젠 미래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고 했다. “아침에 눈뜨면 마음이 설레요. 하고 싶은 게 많아졌으니까.” 은영이는 자세를 바로잡고, 졸업식을 위해 클라리넷을 열심히 불기 시작했다.

글=한은화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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