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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남북학술교류 서두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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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교류가 다양하게 급템포로 진행되다 주춤하는 듯하더니 다시 열리는 것 같다.

그러나 한 발짝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학술교류다. 처음 평양에서 발표된 합의서에 문화교류가 포함됐지만 우리말에서 문화라 하면 학술보다 문학.예술을 뜻한다.

3차 장관급회담에서 남쪽이 학술교류를 제안했다고 하나 북쪽은 다음 회담에서 반응을 보일 모양이다.

남북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국제학회에서 비공식 접촉을 해 오다 1990년대 들어서는 산발적으로 공식 모임을 가져왔다.

다만 남북의 만남이 제3국에서만 이뤄졌고 한반도에서는 한번도 학술교류가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몇몇 대학총장들을 초청해 가기는 했어도 제대로 된 학술교류라고 보기는 어렵다.

*** 학계 상호방문 추진을

북한과 교류하려는 남한 학계의 열망은 모든 분야에서 뜨거웠다. 과학기술의 경우 과총이 남북과학기술교류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노력했고 91년 중국 옌지(延吉)에서 남북 과학자들이 함께 참가한 대규모 학술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남북 정치학자들은 독일에 있는 송두율(宋斗律)박사의 주선으로 5년째 베이징(北京)에서 남북 해외학자 통일 학술회의를 가져왔다.

이 모임은 상호이해와 신뢰구축에 큰 성과를 거둔 성공사례다.

철학연구회는 88년 처음으로 북한철학을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남북교류의 의욕을 보였다. 3년 뒤 한민족철학자대회를 준비하면서 대회장 소광희(蘇光熙.서울대)교수와 나는 북한 철학자들을 초청하기 위해 일본 조선대학교를 찾아갔다.

그곳 철학자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북한 철학자들에게 서울에 와서 주체철학을 맘껏 소개해 보라는 초청장을 보냈다.

대회 직전 북한은 판문점을 통해 긍정적인 회신을 보내왔다. 그러나 대회 명칭 문제로 북한의 참가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 뒤에도 대회가 열릴 때마다 북한을 거듭 초청했으나 허사였다. 하지만 총련계 철학자들과의 교류는 계속됐다.

이듬해 나는 이훈(경남대)교수와 함께 조선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북한 철학잡지와 단행본을 전부 복사해 왔다.

이 자료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들에게 넘겨져 집중 연구됐고 94년 학회지 '시대와 철학' 에 그 결과가 발표됐다.

*** 4차 장관급회담에 기대

과학사 분야에서도 남북은 조선대학교를 통해 10년 동안 자료교환을 해 왔다. 나는 98년 조선대 교원과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전통과학기술 연구의 쟁점' 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기도 했다.

같은 해 한국과학사학회는 조선대 임정혁 교수를 총회 연사로 초청했다. 임교수는 오지 못했으나 그의 논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과학사 연구' 는 대독됐고 '한국과학사학회지' 에 한자도 고치지 않고 실렸다.

그가 일어로 번역 출판한 북한 과학사학자 리용태의 책은 한국 학자들의 해설을 붙여 서울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이렇듯 남북 학술교류는 간접적인 경로를 통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양쪽에 매우 유익했다. 이제 화해시대에 접어든 남북은 학술교류를 양성화함으로써 통일에 이바지해야 한다.

남북의 학문은 이념 대립으로 말미암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학문을 이해함은 중요하며 공동으로 협력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다.

냉전시대 미.소 과학자들이 거듭 만나 핵무장 해제에 기여한 퍼과시 회의는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우선 급한 것은 남북 학계 대표단의 상호방문이다. 이렇게 첫 단추를 끼우고 나면 협의체를 구성해 학술교류의 큰 그림을 그리고 세부 실천방안을 짤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을 예로 들면 남쪽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학술원.과학기술한림원.공학한림원.과총이 있다.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사회과학연구협의회.학술단체협의회.전국대학인문학연구소협의회와 대표성을 인정받고 있는 한국철학회.역사학회 등을 꼽을 수 있다.

남북은 개성공단 개발에 합의한 바 있다. 학계는 그에 앞서 남북 공동학술조사단이 문화재 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북 학술협력이 시급함을 보여주는 보기다. 4차 장관급회담에서 정부는 학술교류 추진을 강력히 밀어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길게 보아 학술교류는 예술.스포츠교류를 능가하는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송상용 <한국과학철학회장.한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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