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맛본 좌파들이여 체질 못 바꾸면 못 살아남는다

중앙일보

입력

관련사진

photo

월간중앙 "우파는 우파답지 않고, 좌파는 좌파답지 않아 지금 나라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죠. 좌파가 정말 좌파다워지면 재집권할 수 있습니다.”

스페셜리포트 | 보수의 고언…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좌파답지 않은 좌파가 위기초래 이익집단 변질…정파적 발상 내던져야

박세일(61)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은 좌파든 우파든 고유의 정체성을 잃었다고 싸잡아 비판했다. 진보에 대한 보수의 고언을 구하자 박 이사장은 “왜 보수한테 주는 고언은 안 다루느냐”고 물었다.

그는 “두 진영 모두 가치집단이기를 포기하고 이익집단화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좌파나 우파나 가치집단이어야 합니다. 저마다 추구해야 할 가치와 원칙을 망각하고 정치적·정파적 이해관계나 인기에만 좌우된다면 더 이상 좌파도, 우파도 아니에요. 그냥 기회주의자 내지는 편의주의자들이죠.”

-좌우 논쟁은 가치 지향을 둘러싼 것이라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러면 진보 진영 내지 좌파는 진보성 혹은 좌파성을 어떻게 회복해야 합니까?

“나는 국가를 운영할 때 좌파의 가치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단적으로 우리 실정에서는 우파적 가치인 자유·성장·세계에 70%의 비중을 두고 좌파적 가치인 평등·분배·민족의 비중을 30% 정도로 잡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나라 진보가 좌파성을 회복하려면 좌파적 가치, 즉 좌파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떤 이상사회를 원하는지 좌파들 스스로 자문해 봐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좌파적 가치를 어떻게 제도화·정책화할 것인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예컨대 좌파적 가치를 소중히 하면서 어떻게 경제성장을 이룰 것인지 답을 제시해야 합니다. 국제환경의 변화도 읽어야죠. 우리나라는 여전히 분단돼 있지만 세계화·정보화라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욱일승천하는 중국과 협력하고 경쟁도 해야 합니다.

이런 조건에서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청사진을 보여줘야 합니다. 한반도 선진화와 통일에 대해, 동북아의 미래에 대해서도 비전을 제시해야죠.”

- 진보의 비중을 30%로 잡는 근거는 뭡니까?

“두 가지입니다. 우선 북한동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통일 과정에서 우리는 전근대적인 북한의 산업화를 지원하거나 주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분간 성장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어요. 또 하나는 우리나라가 아직 중진국 선두주자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할 선진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선진국에 진입하고 통일까지 된다면 그때는 성장과 분배의 비중을 50 대 50으로 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북주의·국가경영 실패에 국민 등 돌려

- 보수 성향의 이명박 정부가 고전하는 데도 진보 진영이 반사이익을 누리는 것 같지 않습니다. 국민이 왜 진보에 등을 돌렸다고 봅니까? 진보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첫째, 종북주의 내지 친북적 자세입니다. 좌파도 기본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공산주의를 하겠다는 극좌는 논외죠. 서구의 좌파는 민족보다 세계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좌파는 민족을 더 중시해요. 북한이 민족을 중시하니 그 영향을 받은 거죠. 친북적 사고에서 빨리 벗어나야 진보가 삽니다.

둘째, 좌파는 국가경영능력 내지 국가정책능력이 약합니다. 구호로 외치는 것은 잘하는데 구체적 정책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보니 일을 잘 못해요. 가난한 사람과 약자를 위해 세금을 많이 걷자는 주장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정서적 좌파는 많지만 정책적 좌파가 드물기 때문이에요.

민주화 과정에서 투쟁하느라 바빠 국가운영을 깊이 들여다볼 생각도 못했고, 그럴 시간도 없었겠지요. 나는 지금이 한국의 좌파가 자기성찰을 통해 거듭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봅니다. 친북문제를 해결하고 정책적 좌파로 자리매김한다면 재집권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좌파가 거듭날 때 우파도 자기반성을 할 것입니다.

셋째, 지난 10년간 생겨난 좌파 기득권도 문제입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좌파적 가치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밥그릇 때문에 좌파적 이념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불행한 일이죠. 나는 우리 사회를 가치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고 국가의 발전을 우선시하는 애국적 이상주의자들이 이끌어야 한다고 봅니다. 좌파냐 우파냐는 그 다음 문제죠.”

관련사진

photo

- 과거 김영삼 정부에 몸담았던 시절 급진적 개혁을 추진한다는 말까지 들으셨는데, 요즘 일부에서는 박 이사장을 보수 진영의 대부라고 합니다. 한국사회가 진보한 것입니까, 아니면 박 이사장이 보수화한 것입니까?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이 보수는 변화를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보수는 어떤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없었죠. 얼마 전 나온 노 대통령의 책에도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보수는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다른 사람 못 타게 하고 우리끼리만 타고 가자고 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진보는 남과 같이 타고 가자는 사람들이다.’ 이는 아주 잘못된 인식입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 잘살겠다는 보수주의자는 없습니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변화에 대한 태도입니다. 진보는 급진적 변화를 선호하고, 보수는 점진적 변화를 원하죠. 변화에 무조건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는 없습니다.

무작정 서둘러 변화를 추구하면 오히려 역작용이 난다고 보는 것이 보수주의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정책지향, 즉 정치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입니다. 이렇게 지향하는 가치를 기준으로 하면 좌파와 우파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우파는 자유·성장·시장·작은정부·세계를 지향하고, 좌파는 평등·분배·국가·큰정부·민족을 중시하죠. 이 두 가지, 즉 변화에 대한 태도와 지향하는 가치를 기준으로 분류하면 저는 우파 진보 내지 개혁적 보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YS정부 시절 청와대에 있으면서 추진한 사법개혁·노동개혁 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우파적 가치를 중시하는 개혁이었습니다.

당시 추진한 일련의 세계화는 기본적으로 소비자의 선택폭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어요. 자유와 시장의 가치를 소중히 했다는 점에서 우파적 개혁이었죠. 다만 개혁의 방식이 급진적이다 보니 ‘너무 과격하다’ ‘좌파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우파 진보적 입장이 옳다고 보고, 그래서 우파적 개혁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 이사장이 지목한 책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유고와 육성을 모은 <진보의 미래-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다. 그가 지적한 대목은 노 대통령의 육성을 녹취한 것이다.

“진보라는 건 그게 아니고 ‘차가 좀 비좁나? 그래도 뭐 다 같이 가야 되는 사람들인데 타야 될 거 아이가’(하는 사람들이고)… 보수는 ‘야, 비좁다. 태우지 마라. 늦는다, 태우지 마라’ 이거죠.”

노 대통령은 또 한국의 보수에 대해 깊은 회의를 드러냈다.

“보수의 철학이 뭐냐? 보수의 철학이 뭐요? 없어요. 보수라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이런저런 글도 읽고 책도 읽고 했는데 철학적 기초가 없습니다. 그 보수, 보수의 가치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을 본 일이 없어요. 그냥 이대로 가자. 이대로 가자인데….”
가치집단으로서의 보수에 천착해온 박 이사장으로서는 “보수는 철학이 없다”는 단정이 거슬렸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과오는 정통성 훼손

- 우파적 개혁은 좌파가 주장하는 개혁과 어떻게 다릅니까?

“가령 제가 사법개혁을 했는데, 사법개혁이란 법률서비스시장을 소수의 법조인이 독점하는 현실을 깨려는 것입니다. 독점돼 있기 때문에 법률서비스 비용이 높고 양질의 서비스도 이루어지지 않죠. 이 독점을 깨려면 변호사를 늘리고, 이들을 충원하는 시스템을 시험을 통한 선발에서 교육을 통한 양성체제로 바꿔야 합니다.

또 제가 한 교육개혁은 좌파적 개혁이 아닙니다. 교육서비스시장에서 학생들 간의 경쟁, 학부모 간 경쟁은 있는데 공급자인 교사와 학교 간 경쟁은 없기에 이런 경쟁을 시켜 교육서비스의 질을 높이려고 했던 것이죠. 한편 교육소비자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학부모가 학교 운영에 참여하는 학교운영위원회를 만들었죠.

학생들에게 학교에 대한 선택권을 많이 주는 것도 기본적으로 우파적 개혁입니다. 세계화시대에 맞게 복수노조를 인정하고 정리해고할 수 있도록 노동법을 합리화한 것도 기본적으로 우파 개혁이죠. 전임자 임금문제를 원칙에 맞게 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법외노조였던 민주노총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썼는데, 민노총의 목표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제도권 안에서 대화로 문제를 푸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월간중앙> 진보 지식인 서베이에서 응답자의 42.9%가 노무현 정부를 진보정부로 규정했습니다. 노 정부 시절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세종시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에 반발해 의원직을 던졌는데, 노 정부의 과오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노 대통령은 세 가지 잘못을 범했습니다. 첫째,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정당성을 훼손하는 발언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역사를 부정하는 자학적 분위기를 만들었고, 헌법적 가치를 가볍게 여겼어요. 대한민국 역사는 잘못된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성공과 승리의 역사였습니다. 전 세계가 한국을 존경하는데 우리는 앉아서 자기부정을 했어요. 대체 어느 나라 진보가 자국의 역사를 공격합니까?

둘째, 집권기에 성장의 동력을 많이 떨어뜨렸습니다. 성장률의 절대수준은 낮지 않았지만 세계의 평균성장률을 밑돌았어요. 1960년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셋째, 국민을 분열시켰습니다. 동서로 가르고, 서울과 지방, 서울의 강남과 강북, 대졸자와 고졸자, 심지어 서울대 출신과 비서울대 출신으로 나눠 놓았습니다. 결국 국가의 정통성 회복, 성장동력 확보, 사회통합을 과제로 남겼죠. 권력과 손잡으면서 시민단체들이 정파성을 띠었고, 시민들에게 외면당한 것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 집권 우파도 성에 차지 않는다면, 박 이사장의 대안은 뭡니까?

“우파가 지향하는 가치는 옳지만 우파의 의식과 자세가 문제예요. 우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변해야 하는데 기득권과 현실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좌우 양쪽 모두 이익보다 가치를 중시하는 철학적 좌파, 철학적 우파가 더 나와야 합니다. 언젠가 결국 좌파와 우파의 가치가 수렴할 거예요.

좌파적 가치와 우파적 가치가 같이 가야 한다는 뜻에서 나는 공동체 자유주의를 주장합니다. 공동체는 좌파적 가치, 자유주의는 우파적 가치죠. 어쨌거나 지금 대한민국은 이념전쟁 중입니다. 세계적으로 냉전은 종식됐지만 우리는 여전히 냉전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죠. 종북적·반체제적 정서를 극복한 새로운 진보와,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희생을 하는 새로운 보수가 나와야 합니다.

즉, 합리적 좌파와 개혁적 우파가 나와 서로 손잡고 대한민국을 선진화해야 합니다. 우파 진보와 좌파 보수가 힘을 합치는 거죠. 그 과정에서 통일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냉전도, 사상전도 끝날 것입니다. 좌우파 간의 불필요한 내부싸움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가운영 능력이 소진되고 있습니다.”

박세일은 누구인가?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은 한국 보수 진영의 대표적 이론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의 산파였고,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수석과 사회복지수석을 맡아 사법·교육개혁, 노동법 개정 같은 굵직한 개혁작업을 주도했다. 박근혜 대표 시절 한나라당에 들어가 17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당 정책위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가 주창한 ‘한반도 선진화론’은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캐치프레이즈였고, 이명박 정부의 정책기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이끄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은 보수 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싱크탱크로 꼽힌다. 박 이사장은 그러나 자신을 ‘보수 인사’로 재단하는 것이 마뜩잖은 듯했다.

그 스스로는 “우파적 가치를 급진적으로 추구하는 우파 진보 또는 개혁적 보수”로 자신을 규정했다. 세종시법 통과에 반발해 1년여 만에 의원직을 사퇴한 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돌아가 우파적 가치인 자유에 좌파적 가치인 공동체를 접목한 ‘공동체자유주의’를 합리적 보수진영에 이념적 좌표로 제시했다.

글 이필재 월간중앙 편집위원 [jelpj@joongang.co.kr] 사진 김현동 월간중앙 사진기자 [lucida@joongang.co.kr]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