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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의 병상 집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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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호 10면

소설가 유주현.

1960년대에 대하소설 『조선총독부』 『대원군』 등으로 큰 인기를 모았던 유주현(1921~82)은 어느 누구보다 프로 의식이 몸에 밴 소설가였다. 그는 40년 가까이 이런저런 직장생활에 얽매여 있었으면서도 소설 쓰는 일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47년 ‘백민(白民)’지를 통해 등단한 이래 약 30년 동안 그가 남긴 작품은 대하소설을 포함한 장편소설이 26편, 중단편소설이 100여 편으로 200자 원고지로 따져 10만 장이 넘는 분량이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52>

유주현은 또한 원고 약속 잘 지키는 것으로도 한국 문단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사람이었다. 직장에서도 틈만 나면 원고지와 씨름했고, 나들이할 때도 쓰다 만 원고지를 저고리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다방이나 식당 같은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해 원고를 썼고, 길을 가다가도 어떤 문장이 생각나면 멈춰 서서 원고지 뒷장에 메모해 두는 게 습관이었다. 집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해선지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원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밤을 새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의 아내는 ‘이러다 당신 쓰러지면 식구들 다 굶어 죽는다’며 만년필을 감춰놓기 예사였는데도 막무가내였다.

70년대에 50대에 접어들었으나 유주현의 소설 쓰기는 오히려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두어 개 신문, 잡지에 장편소설을 겹치기 연재하는가 하면 단편소설 청탁이 와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20년간 봉직했던 ‘신태양사’의 주간직을 사임하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임하는 한편 새로 창립된 한국소설가협회의 회장을 맡는 등 사회생활은 더욱 바빠지고 있었다.

유주현은 특히 중앙일보와 인연이 깊었다. 70년 장편소설 『우수의 성』 연재를 시작으로 줄곧 중앙일보 연재소설의 단골 필자였다. 그의 소설이 늘 재미있게 읽히고, 특히 그의 소설만 찾는 열성 독자가 유난히 많았기 때문이다. 뒤이어 조선조 초기 단종과 세조 시대의 궁중 비사를 다룬 역사소설 『파천무(破天舞)』도 열독률이 매우 높았다. 이 작품은 후에 KBS-TV의 사극으로도 방영돼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파천무』에 이어 76년 10월부터 연재된 작품이 『금환식(金環蝕)』이었다. 3년 예정의 이 대하역사소설을 통해 작가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웅지를 ‘북벌론’으로 확대시킨 영웅담을 장쾌한 필치로 펼쳐 보이려 했다. 이야기가 한창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무렵, 2년을 채우지 못한 78년 가을의 어느 날 작가로부터 힘없는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약간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됐지만 소설 연재에는 지장이 없게 할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전화였다.

기자는 곧 그가 입원해 있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다. 중앙대학교가 마련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 버스를 타고 속리산으로 가던 중 버스가 덜컹거려 허리가 삐끗했다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척추골절’로 진단했지만 증세가 그리 심하지 않으니 곧 나을 수 있으리라는 얘기였다. 병상에는 환자용 식탁이 펼쳐져 있었고, 그 식탁 위에는 취재 노트와 여러 자료 그리고 원고지들이 쌓여 있었다. 기자가 조심스럽게 ‘연재는 잠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으나 환자는 ‘연재소설은 독자와의 약속’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부인과 자식들이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원고는 계속 차질 없이 공급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 때던가, 어느 날부터 원고지의 글씨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한 사람의 글씨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글씨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우선 삽화를 맡고 있던 김세종 화백에게 연락했더니 ‘환자가 병상에서 구술하는 것을 식구들이 번갈아 받아쓰는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둘째 사위인 소설가 오인문과 그의 교수실 조교인 소설가 박양호도 소설 받아쓰기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병원으로 달려가 담당 의사부터 만났다. 담당 의사는 ‘저렇듯 무리를 하시니까 다른 합병증까지 생기고 있다’며 ‘모든 일 제쳐놓고 무조건 쉬셔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환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거의 강제적으로 연재를 중단토록 했다. 결국 소설 『금환식』은 미완의 소설로 남게 됐다. 유주현은 1년쯤 후 병세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 지팡이에 의지한 채 바깥나들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자와 두어 차례 식사도 함께했다. 그때마다 그는 연재를 계속할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82년 5월 61세로 타계했다. 소설가로서의 프로 정신도 좋지만 지나친 집착이 가져왔을지도 모를 안타까운 종말이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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