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정의구현사제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시인 조태일(1941~99)의 5주기를 기리는 시선집 '나는 노래가 되었다'에는 실재 인물에게 주는 시 한 편이 나온다. '짧은 시-종철에게'는 참으로 짧다. 짧지만 굵고 진하다. "책상을 손바닥으로 '탁' 치니까/'억'하고 쓰러져 숨졌다?//종철아, /네가 모른다고 책상을 '탁' 치니까/아저씨께선/'억'하고 쓰러져서 운명하시고/너는 이렇게 살아남았느냐?"

이 시의 주인공 박종철은 87년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었다. 1월 14일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참고인으로 치안본부 대공 수사관에게 끌려간 건강한 청년 박종철은 하루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이때 경찰이 발표한 사건 경위가 바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었다. 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 된 기막힌 죽음이다.

하지만 역사를 꿰뚫는 시인은 거꾸로 노래했다. 물고문을 받다가 숨진 종철은 살아남았고, 그를 고문치사하고 권력을 쥔 아저씨는 운명했다는 조태일의 반전은 십수년이 흐른 지금, 진리를 통찰하는 눈으로 빛난다.

박종철군 사건은 하마터면 시인이 붙인 물음표처럼'탁-억'으로 땅 속에 묻힐 뻔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진실을 가리어 숨기려는 그 절박한 순간에 군부 독재 세력에 맞선 이들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다. 부검을 맡았던 의사의 일기와 증언을 끌어내며 끈질기게 싸운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조작됐다는 사실을 폭로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을지도 모른다.

74년 '정치현실에 대한 의사표시를 사회구원의 원리에 입각해 사목행위의 하나로 펼칠 것'을 활동 목표로 내걸고 창립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30돌 장년을 맞았다. 94년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왔던 유대인 신학자 마크 앨리스는 '당신들 20년 노력의 덕을 누가 보았다고 생각하느냐'는 뼈아픈 질문을 던졌다. 그 자리를 지켰던 함세웅 신부는'결국 적과 교회만 살찌게 한 것이 아니냐'는 그의 지적이 사제들 가슴을 아프게 했다고 돌아봤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흘렀다. 부끄러운 성전을 돌아보고 더 낮은 곳에서 민중과 함께 가겠다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다짐이 종소리처럼 들려온다. 200년, 짧다면 짧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성당의 높은 담을 허물고 거리로 나서 30년을 소걸음한 그들의 초심이 박종철처럼 오래 살아남기를 이 가을 기도한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