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 탄생 100주년] 정준명 전 삼성 회장비서팀장 기고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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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탄생 100주년 1910. 2. 12 ~ 1987. 11. 19

삼성 창업자인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의 탄생 100주년(2월 12일)을 맞아 호암을 추모하는 정준명(65) 전 삼성재팬 사장의 기고를 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정 전 사장은 1980년대 초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비서팀장을 지내는 등 7년여 동안 호암의 지근거리에서 근무했습니다. 호암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면서 갖가지 구두 지시를 받아 기록했던 그는 삼성 출신 인사들 중에서도 호암을 잘 기억하는 인물로 꼽힙니다.

◆호암은 한국 현대경영의 아버지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여 온 삼성그룹의 창업주 고(故)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회장(이하 호암)의 탄신 100주년을 2월 12일에 맞이하게 되었다. 많은 분이 흠모하며 학문적 접근을 본격화하는 가운데, 부족하나마 온고지정(溫故之情)으로 삼가 추모한다.

호암을 직접 뵙고 성장해온 삼성의 임직원들은 이제 그룹 내에도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타이름과 꾸지람, 칭찬을 받던 임직원들이 호암의 창업정신과 선견지명, 그리고 에피소드를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음은 틀림없다.

호암은 희망과 꿈을 실현해낸 스토리를 갖고 있고, 그의 인간적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수많은 에피소드는 국경도 넘는 것 같다.

호암이 1983년 경기도 기흥의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부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 공장은 선진국에서 공장 건설에 걸린 기간의 3분의 1인 6개월 만에 완공됐다. [삼성그룹 제공]

국민소득에 걸맞은 사업 전개란 말은 요새 와서 이해가 되지만, 호암의 경공업적 소비재 사업이 비난받던 때가 있었다. 설탕 만드는 기술은 당시 첨단기술이었는데, 그럼 그때 배곯는 국민을 위해 유조선을 만들 수 있었는데 안 했다는 건지 필자는 이해할 수 없다. 기초가 무너진 전후(戰後)에 고아와 상이용사, 가난과 폐허가 보이는 것의 전부이다시피한데 무슨 사업을 했어야 칭송을 받을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산업의 발전은 사회자본의 여건과 단계에 따라 큰 강물처럼 꾸준히 흐른다고 본다. 호암은 경영력과 자본력을 갖출 수 있게 되자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역설했다. 그 기술의 출처는 사람밖에 없음을 알고, 호암은 잘 뽑고 잘 배치하고 잘 대우하는 것을 늘 생각했다. 1957년 한국인의 연고성을 탈피하는 철저한 실력 위주, 인물 위주로 공채사원 모집을 국내 처음 실시했다. 68년엔 최초로 여비서 공채를 단행했다. 인재제일의 공정한 실천 의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그룹의 경영자원 조정 시스템으로 창안한 것이 비서실이란 독특한 조직이었다. 호암의 경영이념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로 정리되는데, 그중의 으뜸이 인재제일이라고 확신한다. 100년 앞을 내다보고 나무를 심는다면 호암은 사람을 심었다. “의심 나는 사람 쓰지 말며, 쓰는 이상 의심하지 말라(疑人勿用, 用人勿疑)”(논어)를 시스템에 접목했다. 호암은 직관력과 경륜으로 어떠한 난관도 안정적인 도형인 삼각구도로 보았다. 단순화하는 통찰력(insight)이 위력을 발휘했다.

◆일본에 대하여

1978년 골프장에서 호암과 두 딸. 막내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가운데)과 맏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호암은 와세다(早稻田)대를 다녔으며 아들 셋을 모두 일본의 유명 대학에 유학하게 하였고, 손자도 그 길을 택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본을 지리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 존재가치를 유익하게 활용했다. 당시 도쿄(東京) 지점장은 매일 아침 9시에 어김없이 걸려오는 호암의 국제전화에 보고할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으며, 출장 때 만나는 일본 재계 인사들과의 일정 짜기와 인맥관리를 하는 것이 중요한 업무였다. 일본의 TV 프로를 보고 녹화할 것을 지정해 줬으며 VCR 테이프를 본 후에는 유관 부서로 내려보냈다. 옆에서 보고 배운 필자는 세월이 흐를수록 감탄하였으며 고위 임원이 되기까지 필자는 일본인과 일본 산업사회를 참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국내엔 ‘수요회’라는 재계 모임을 개최해 소통의 장을 열었다. 도움을 나눈 친구, 지금 필요한 친구, 필요할 친구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만났는데, 이는 국내외 어디서나 한가지였다. 호암은 앞으로 일본이 중요하니 공부하고 노력해 일본통이 될 것을 지시했다. 일본의 저명인사들과 무수히 접하면서 그들은 한국사람 중에 최고의 일본통으로 단연 호암을 꼽는다는 것을 알았다. 필자는 좋은 선생님을 만났던 것이다.

평소 숙제를 많이 냈는데 필자의 보고서를 본 후 또는 직접 지시한 말씀 중에 “일본을 등한시하지 말라. 가까이 있는 일본부터 배워라.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이길 수 있고 그들과 대등해질 수 있다” “일본에서 평가 받으면 세계에서도 통용된다” “일본은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노?” 등을 누누이 강조했다. 무엇이 부족한지 철저히 분석하게 했다.

한때 삼성그룹 임원의 약 70%, 간부의 약 절반이 일본어를 구사했으며 일본에 출장 또는 주재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든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옆 가게처럼 활용했다. 호암은 먼저 임직원들의 사물을 보는 눈높이를 중시했다. 언행과 용모와 태도를 강조했다. 골프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기본에 충실한 장기적 인재 관리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주재원들이 선진국에서 보고 배운 것을 고국에 돌아와 제대로 활용해줄 것을 기대했다. 도쿄는 물론 세계 주요 도시의 지점 사무실은 그 도시 최고 평판의 고층 건물에 두게 하여 주재원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이끌어내게 했다. 필자가 경기도 수원에 근무하다 74년에 도쿄 주재원으로 부임했을 때는 가스미가세키(霞が關) 빌딩이 가장 높고 현대식 고층 빌딩이었는데, 그곳 사무실에 출입하면서 대단히 자랑스러웠다. 당시 양국 관계가 썰렁할 때인데 도쿄에 태극기가 걸려 있던 곳은 대사관, 민단(民團) 이외에는 이 빌딩밖에 없었다. 삼성이 입주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주재원들에게 집을 잘 빌려주려 하지 않을 때인데, 회사가 이 빌딩에 있다고 하면 우리를 다시 보았다.

제일모직 대구공장의 한국 최초 최고의 여사원 기숙사는 당시 호텔 수준이었다는 전설 같은 실화(實話)가 있다. 일본의 전자합작사(Sanyo)가 겨울 준비로 사내에 김장을 대량으로 해두어야 한다는 호암의 제안을 따를 수 없다고 했고, 전 세계에 없는 김장보너스 지급을 반대했지만 끝내 관철시킨 일화는 호암의 임직원 사랑의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70년대에 수원에 주재했던 일본 기술자들은 삼성을 도왔던 당시의 에피소드를 자랑하고 있었다. 제자가 스승이 되었으니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회고했다.

◆인사와 정보 연결의 테크닉

호암은 그룹의 구심점이며, 정말 끊임없이 현장의 정보를 모으고 나누고 확인하고 장악해 빈틈이 없었다. 적당히 넘어가는 일이나 거짓말, 매너가 그릇된 것은 받아주지 않았다. 가치와 의미가 있는 정보라면 대소경중(大小輕重)을 가리되 놓치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다. 마치 커다란 스펀지와 같았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직접 만났고 보고서와 다큐멘터리를 읽었다. 하루하루가 궁금하여 못 견디는 성품처럼 보였으며 엄격한 시간관리로 자기 연마를 반복했다.

기술자는 경영을 알아야 하고 경영자는 기술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해마다 정기 임원 인사를 했는데, 사장이 인문계이면 부사장은 이공계로, 사장이 기술계이면 부사장은 경상계로 했다. 조직과 경영의 밸런스를 위해 경영의 기본은 같다면서 업종이 다른 회사의 사장들을 맞바꾸기도 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사람에 주목하고 이미 멀티플레이어(multi player)를 기대했고 그렇게 인사를 했던 것 같다. 학문보다 인간이 우선이란 말씀에서나 전인적(全人的) 교양을 갖추어야 전인적 인재라는 말씀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상을 강조하곤 했다.

정보-지식-지혜라는 사이클을 일찍이 실천했다. 성과를 내게 하는 혜안과 조련술에 감탄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학력이나 학위, 출신보다 능력과 효율, 시너지, 그리고 사람 됨됨이를 중시하여 인사를 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 기준이었다. 성공 스토리를 스스로 만들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사내 파벌 같은 것도 없도록 했다.

성공의 자만을 경계해 냉탕 온탕의 인사를 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좌천이라 할 인사를 한 후에도 용의주도하게 긴장하게 하고 목표관리를 하게 했다. 버릴 사람은 아예 야단도 치지 않았으며, 눈여겨본 사람은 매정하게 다루며 중용(重用)했다. 심부름을 시켜 보고,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해 보며, 해답이 없을 것 같은 숙제를 내 보며 끊임없이 사람 됨됨이를 체크했다.

유대인들은 훌륭한 답변보다 훌륭한 질문을 더 높이 평가한다고 하는데 정말 호암은 훌륭한 질문자였다. 질문할 땐 이미 상당한 수준에서 말문을 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재 획득에 대한 욕심은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놓친 인재가 다른 그룹에 가 있으면 반드시 돌아오게 했다. 부하의 장단점은 본인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았다. 사장보다 처우가 더 좋은 전문가(고급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했으며, 독신자를 위한 호암생활관을 만들어 직접 환경을 점검했다.

정준명 전 삼성 회장비서팀장은 …

▶1945년생. ▶74~81년 삼성전자 도쿄지점 ▶81~83년 삼성 회장비서실 비서팀장 ▶89~92년 삼성전자재팬 대표이사 ▶92~93년 삼성 회장비서실 비서팀장 ▶ 98~2004년 삼성재팬 대표이사 사장 ▶2004~2007년 삼성인력개발원 상담역 ▶2007~현재 법무회사 리인터내셔널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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