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비밀계좌 정보 큰돈 들더라도 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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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독일 정부가 자국민의 스위스 계좌 정보를 돈을 주고 사겠다고 밝혔다. 스위스 은행 직원이 불법적으로 빼낸 정보를 거액을 주고서라도 입수해 탈세를 추적하겠다는 것이다. 스위스는 “장물 거래를 하겠다는 것이냐”고 반발하고 있다. 독일은 조세피난처로 유명한 유럽의 소국 리히텐슈타인의 은행에서 빼돌려진 계좌 정보를 산 적이 있다.

◆독일, “탈세 추적이 우선”=파이낸셜 타임스 독일판 등에 따르면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1일(현지시간) “스위스 계좌 정보를 확보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최근 기자회견에서 “탈세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탈세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는 데 동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와 쇼이블레 장관이 언급한 계좌 정보는 스위스의 HSBC 프라이빗뱅크의 직원이었던 프랑스인 에르베 팔시아니(37)가 2006∼2007년 은행 컴퓨터에서 불법으로 유출한 것이다. 그는 독일 정부에 “독일인 1500여 명의 정보가 담긴 CD를 250만 유로(약 40억원)에 넘기겠다”고 제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신에 따르면 금융 전문가들은 CD에 총 2억 유로(약 3260억원)의 예금 정보가 들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팔시아니는 독일인·프랑스인 등 수천 명의 고객 정보를 빼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는 지난해 그에게서 탈세 관련 정보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프랑스는 최근 이 자료의 원본을 스위스 정부에 넘기며 “우리가 확인한 정보를 다른 나라에는 제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스위스, “장물 취득이다”=독일 정부가 계좌 정보 ‘구입’을 추진하자 도리스 로이타르트 스위스 대통령은 “정부가 범죄자와 거래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것이며, 스위스는 그런 상황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한스루돌프 메르츠 스위스 재무장관도 “도난당한 고객 정보에 대해서는 (계좌 정보 확인 등의) 행정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정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가진 것이 진짜 정보라는 보장도 없다”고 덧붙였다. 스위스는 훔친 정보가 거액에 거래될 경우 은행 직원의 정보 유출이 잇따를 수 있음을 걱정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스위스는 지난해 수천 명의 미국인 은행 고객 정보를 미국 정부에 넘겼다. 미국의 줄기찬 요구에 굴복한 것이다. 이 때문에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가 깨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독일은 2008년에도 리히텐슈타인 은행 직원이 불법으로 획득한 고객 정보를 420만 유로에 사들여 탈세 수사를 벌였다. 당시 160여 명이 조사받았다. 클라우스 줌빈켈 도이체포스트(우편·배송 전문업체) 회장의 탈세 사실도 드러나 그는 징역 2년(집행유예)과 100만 유로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파리=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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