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정화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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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천지지신(天地之神)은 감동하사 한양성 이몽룡을 청운(靑雲)에 높이 올려 내 딸 춘향 살려지이다!" 집 울안 개울물에 머리 정갈하게 감아 빗고, 정화수(井華水) 한 동이 바쳐 놓고 춘향 모친 월매는 사위 몽룡의 장원 급제를 빈다.

어사 행색 감추려 거지꼴로 한양서 내려와 이를 몰래 바라본 몽룡은 "내가 벼슬한 게 조상님의 음덕인 줄 알았더니, 우리 장모 덕이로다!" 며 감복한다.

'춘향전' 의 무대 전북 남원 광한루의 월매집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학부모.학생들이 몰리고 있다.

남원시에서 '춘향전' 모습 그대로 꾸며놓은 '장원급제 기원단' 에서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어디 이곳뿐이겠는가. 전국의 교회와 사찰, 그리고 명산대천은 물론 수능을 앞둔 가족들에게는 하루 하루 일상의 공간이 기도처일 것이다.

예부터 우리는 가족에게 큰 일이 있으면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다. 정화수는 첫새벽 첫번째로 길어올린 맑은 물이다.

그 맑은 물은 비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맑음을 뜻한다. 그래야만 월매 빌듯 "천지지신 일월성신은 화위동심(化爲同心)하여" 비는 상대가 어떤 신이든 신과 통할 수 있다.

이런 지극한 자세가 수험생 등 당사자 마음을 크게 움직여 그 또한 같은 마음을 갖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며 지성으로서 신과 비는 사람, 그리고 그 대상자를 연결해 주던 정화수가 요즘 여러 '수능합격 기원상품' 으로 변형돼 나오고 있다.

'철썩 붙어라' 며 교문 앞에 붙이던 엿은 이제 '잘 찍어라' 는 카메라엿이나 도끼엿, '잘 쳐라' 는 화투엿으로 바뀌었다.

엿뿐 아니라 백화점이 앞다퉈 별도 코너를 둬 각양각색의 합격기원 상품을 팔고 인터넷서비스업체도 이에 가담할 정도로 이제 합격기원이 상품화하고 있다.

일본에도 합격이나 승진 등을 비는 풍속은 일반화됐다. 신사 나무마다에 기원을 적어 매단 쪽지들이 눈꽃처럼 피어 있으며 상점에서도 기원상품이 수북이 쌓여 팔려나간다.

이를 두고 '인스턴트 카르마(즉시발복)' 란 비난의 소리도 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이 불교에서의 업(業.카르마)인데 노력 없이 복을 마치 즉석복권 사듯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화수 떠놓는 정성이라면 큰 일을 앞두고 무엇에라도 빌고 빌어주고 싶은 심정을 탓할 수 있겠는가.

내일 모레면 수능시험이다. 평온한 마음으로 아무 실수 없이 노력한 만큼, 바라는 만큼 좋은 결과 있기를 빈다.

이경철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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