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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김사인 '주왕산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가을볕

이 엄숙한 투명 앞에 서면

썼던 모자도 다시 벗어야 할 것 같다

곱게 늙은 나뭇잎들 소리내며 구르고

아직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

아무도 남은 길 더는 가지 않고

온 길을 되돌아보며

까칠한 입술에 한 개비씩 담배를 빼문다

어떤 얼굴로 저 가을볕 속에 서야

사람은 비로소 잘 익은 게 되리

바지랑대도 닿지 않는 아슬한 꼭대기

혼자 남아 지키는 감처럼

- 김사인(45) '주왕산에서' 중

백두대간은 그 정수리에서부터 오색 비단으로 산들을 휘감다가 이제 주왕산에 이르러 한 시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썼던 모자를 벗어야 할 것 같은 엄숙한 가을볕살의 투명 앞에서 곱게 늙은 나뭇잎들의 구르는 소리며 살아 숨쉬는 것들의 몸 부비는 소리에 묶여 온 길을 되돌아 보는 길손들. 아슬한 꼭대기의 까치밥처럼 잘 익고 싶은 사람의 얼굴 하나가 투명한 햇볕에 타고 있다.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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