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담합 과징금 2263억 내일 최종 판정 … 소주값의 경제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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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국세청의 행정지도에 따라 업체들이 가격을 올린 것이다. 정부의 지도를 따른 걸 담합이라고 몰아붙여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소주 업체)

“행정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담합을 했다.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정거래위원회)

대규모 과징금 부과를 놓고 소주업계와 공정위의 충돌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3일 소주업계의 담합 혐의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릴 예정이다. 공정위는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 소주 업체에 총 2263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겠다는 방침을 전달했다. 소주 업체들의 반발은 강하다. 정부 정책에 순응한 업체들이 부처 간 법적 논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과징금을 무는 게 불합리하다는 주장이다. 같은 사안을 두고 왜 이렇게 입장이 다를까.

◆과징금 부과 방침 통보=2008년 12월 28일 소주업계 1위 사업자인 진로가 소주 출고가격을 5.9% 인상했다. 나머지 업체는 그후 18일 사이에 자사의 소주 가격을 3.3~7.1% 올렸다. 특정 시기에 비슷한 인상률을 발표했기 때문에 담합 의혹이 제기됐다.

공정위는 이에 따라 조사를 벌인 뒤 지난해 11월에 업계 1위인 진로에 116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겠다는 방침을 통보했다. ▶두산(과징금 246억원) ▶대선주조(206억원) ▶금복주(172억원) ▶무학(114억원) ▶선양(102억원)에도 같은 방침을 전달했다. 진로의 과징금은 2008년 영업이익의 80%에 달한다. 선양이 통보받은 과징금은 연간 영업이익의 8.5배에 달한다. 소주 업체들에 상당한 타격이 될 만한 수준의 과징금이다.

◆소주업계 반발=소주업계는 이런 가격 인상이 면허권자인 국세청의 지도에 순응한 것이라고 반발한다. 한국주류산업협회 관계자는 “국세청이 소주 가격에 대한 명령권한을 가져 업계에서 자체적으로 가격을 조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 2004년 5월부터 2007년 5월까지 3년간 원료가격이 매년 인상됐지만 업체들은 국세청 승인을 얻지 못해 가격을 조정하지 못했다. 2008년에는 원부자재 가격이 폭등해 가격 인상 요인이 컸지만 바로 올리지 못하고 12월 말에 가서야 국세청의 행정지도에 따라 일부 인상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2008년부터 52개 ‘MB물가’ 대상에 소주를 포함해 중점 관리했기 때문에 가격을 올리기가 더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소주 가격 인상 시점을 정부가 결정하는 데다 원료나 부자재 가격도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업체별 소주 값 인상 시기와 인상률이 엇비슷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소주회사는 주원료인 주정을 ‘같은 가격’에 구입해 쓰고 있다. 병과 병마개의 가격도 거의 차이가 없다.

◆행정지도 관행=국세청이 소주 가격을 ‘행정지도’ 형식으로 통제한 건 오랜 관행이다. 소주 가격을 일정 수준 이하로 억제한 것은 주세법에 따른 적법한 조치라는 게 국세청의 설명이다. 주세법 40조와 동법 시행령 50조는 ‘국세청장이 가격에 관한 명령을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세청의 소주 가격 통제는 1999년 규제개혁위원회의 권고로 사전신고제에서 사후신고제로 바뀌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업체들은 미리 행정지도를 받은 뒤 당국이 납득하는 수준에서 가격을 신고했기 때문이다.

국세청이 50.8%의 시장을 차지하는 진로의 출고가격을 승인하면 다른 업체는 진로를 가이드라인으로 삼아 적절한 가격을 정했다는 게 협회의 설명이다.

◆공정위 주장=공정위 관계자는 “3일 전원회의를 앞두고 이 사안에 대해 언급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공정위는 행정지도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업체들이 행정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담합을 했다고 본다.

공정위가 2006년 만든 ‘행정지도가 개입된 부당한 공동행위에 대한 심사지침’에 따르면 사업자들이 행정지도를 따라 담합을 했다면 원칙적으로는 위법이지만 법령에 따른 정당한 행위로 인정되면 예외로 간주한다. 이번 건은 정당하지 않다는 게 공정위의 시각이다. 공정위는 사업자들이 독자적으로 행정지도를 따랐다면 담합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행정지도를 앞세워 사업자끼리 별도 합의를 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문제를 삼고 있다.

공정위는 행정지도를 ‘정책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상대방의 임의적 협력을 기대하면서 하는 비권력적 행위’로 정의한다. 한마디로 안 따라도 그만이라는 얘기다. 행정지도에 따를지는 민간의 자유의사에 맡긴다는 법원 판례도 있다. 소주업계에선 이에 대해 “실정 모르는 소리”라고 반발한다. 과연 어느 간 큰 업체가 국세청의 행정지도를 따를지 말지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행정지도의 적법성 여부는 국세청과 공정위가 논의할 문제”라며 “부처별로 법을 해석하는 논리가 달라 정부 정책을 따른 업체가 피해를 본다면 정부에 대한 불신만 커진다”고 말했다.

◆소주업계 규제 역사=한국에 처음 주세법이 제정된 건 1909년 2월이었다. 구한말 일본인이 한국 정부의 재정고문으로 오면서 만들었다. 세수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그 이후 1924년 평남 용강에서 진로의 전신인 진천양조상회가 창립돼 진로(眞露)소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소주회사보다 법과 제도가 먼저 생긴 셈이다. 정부 규제의 틀 위에서 소주 시장이 형성돼온 것이다. 77년엔 지방 소주회사를 보호하기 위해 ‘자도주 50% 의무구입 제도’를 도입했다. 이른바 ‘1도1사’ 체제로 시장을 쪼개 지방 소주사에 안정적인 수요 기반을 마련해준 것이다. 아직까지 소주시장에 지역별로 ‘터줏대감’이 존재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하지만 이런 ‘시장 쪼개기’는 96년 12월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폐지됐다.

최병선 규제개혁위원장(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은 “시장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격이고, 가격규제는 모든 왜곡의 시작이자 종착역”이라며 “원칙적으로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선 가격 규제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경호·이수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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