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무한도전’의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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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무엇보다 치고 받고 얼굴은 붓고 망가지는 가운데서도 한 치고 물러서지 않는 두 여자의 치열한 싸움을 보며 ‘나태한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게 됐다’는 삶의 고백들이 쏟아졌다. 모두 진지하고 경건했다. 내 머릿속으로는 쓰바사 선수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권투’ 하면 떠오르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던 것 같다. 나는 일곱 살 때 유제두가 세계챔피언이 됐을 때부터 스무 살 넘어 유명우가 17차 방어전을 마칠 때까지 세계타이틀 매치는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보았는데, 그건 유난한 권투광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지독히 싫었고 그래서 평소에는 한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부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때가 권투경기를 보면서 “잽, 잽, 스트레이트!” “좌우로 흔들어!” “어퍼컷!”을 함께 외치고 점수를 매기던 그때였다. 그러니까 권투에 미칠 수 있었던 내 어린 시절의 뜨거움, 그리고 아버지와의 애증의 추억을 들추어 내면서 바라본 여자선수들의 집념의 불꽃이 눈물을 흘리게 했나 보다.

무엇인가를 보며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을 환기시키고 인생을 비추어 보게 만드는 건 위대한 작품들이 가지는 특질이다. 그것이 소설이건 영화건 드라마건 간에. 그런데 ‘웃고 즐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주말 오락쇼가 그걸 제대로 건드린 것이다. 가녀린 여자들이 상대의 얼굴에 팡팡 던져 대는 그 주먹들이 보는 이들의 가슴 깊숙한 곳에 먼지 쌓인 채 잠들고 있는 오래된 정열, 집념 같은 기억들을 두드려 댔다. 깨어나라고. 이건 너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이 쇼는 ‘한·일전’이라는 손쉬운 대결구도와 탈북자 주인공의 일방적인 인간 승리의 감동 드라마를 과감히 버렸다. 그저 냉혹한 링 위에 서는 두 여자의 이야기와 집념과 노력을 차분하게 비춰줄 뿐이었다. 치열한 경기 후 누구 하나의 손이 번쩍 들려지는 하이라이트 장면도 과감히 삭제했다. 그럼으로써 보는 이들의 가슴을 움직이고 삶을 돌아보게 한 무한도전 스스로가 가장 빛나는 승자가 됐다. 이 ‘쿨’한 이야기 방식은 마침 중대한 스포츠 이벤트를 연달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새겨둘 만한 것들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치열하게 싸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짓에 담겨 있는 삶의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들은 승자나 패자나 할 것 없이 모두 진지하고 소중히 쌓아 올려 왔다는 것. 그리고 싸우는 이나 지켜보는 이나 경기를 통해 자신의 삶의 이야기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차분히 돌아보는 것. 2월부터 펼쳐질 올림픽이나 6월의 월드컵을 보면서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무한도전’의 승리 방식이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