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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중앙시평

68세 김정일의 3기 국가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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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97년 노동당 총비서에 오른 김정일에게 국가를 유지하는 것보다 시급한 과제는 없었다. 그래서 1기의 경제전략이 계획경제를 내세우고 국방공업을 우선으로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시장경제의 침투를 막고 자위(自衛)의 군사력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붕괴 방지에는 유효한 방안이었지만, 성장을 가져오는 방안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1차 남북 정상회담으로 붕괴의 우려에서 벗어난 김정일이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 조치’를 실행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계획경제 체제에 시장경제 수단을 결합하는 2기 경제전략이 출범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패였고, 인민 생활은 여전히 곤궁했다. 국방공업 우선 정책으로 경공업과 농업에는 재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너무 늦게 한 탓에 2007년 2차 정상회담도 합의로만 남았을 뿐, 실제적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더욱이 보조적 역할로 도입한 시장경제는 날로 번창하며 도리어 계획경제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붕괴의 위험이었다. 2기 전략의 본질적 변화가 필요했다. 게다가 건강도 여의치 않은 채 68세가 되는 김정일에게 3기란 단지 새 시기가 아니라 마지막 시기를 의미했다. 그만큼 그는 근본적인 문제부터 고민했을 것이고, 그 핵심은 “나의 시대를 무엇으로 마감할 것인가”였을 것이다.

우선 그의 시대는 강성대국 완성 시대로 기억되어야 했다. 강성대국은 그 스스로 확약한 것이므로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야 ‘강성대국을 건설한 경애하는 장군님’이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한 위대한 수령님’과 동격으로 추앙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3기는 국방공업 대신 인민 생활 향상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는 세습체제를 최대한 공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을 없애야 했다. 세습의 명분은 온전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계승·발전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3기는 계획경제 복구와 인민 생활 향상 혹은 체제 수호와 경제성장이라는 기묘한 모습이 되었다. 당연히 이 두 가지는 장기적으로 병립할 수 없다.

그러나 2012년까지의 단기라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그 자신도 일단 그때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지난해 3월 희천발전소 공사부지를 찾은 김정일이 2020년께 완공 보고를 듣고는 “그럼 난 못 보겠군”이라고 했다는 소문이고, 그래서 2012년까지 완공을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생사 여부를 떠나 김일성 탄생 100년이자 자신이 70세가 되는 2012년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해로 선포하기에도 알맞다. 바다에선 대포를 쏘면서 육지에선 회담을 하자는 상충의 행태도 같은 맥락이다. 우왕좌왕도 아니고 내부의 강온 갈등도 아니다. 모두 3기 전략에 충실한 역할이다. 체제 수호를 위해선 무력 긴장도 불사하지만, 경제적 지원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원에 목을 매는 형편으로 해석하긴 곤란하다. 남한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인민 생활 향상은 오히려 체제 유지에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나름대로의 준비 없이 무작정 3기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족한 재원은 중국에서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경제제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최근 국가적인 외자유치기관을 설립한 것도 중국의 협조 약속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마침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언급했다. 회담의 성공을 위해서는 김정일의 3기 전략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단순히 ‘3000’이라는 지원만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며, 계획경제 포기를 뜻하는 ‘개방’도 받아들여질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비핵·개방 3000’의 첫 번째인 비핵의 요구가 바람직하다. 지금 김정일에게 핵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마지막 과제를 관철할 수단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3기의 성공을 보장한다면 비핵은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 ‘핵을 가진 시장경제’보다는 우선은 ‘핵을 버린 계획경제’ 북한이 오늘의 우리 국익에도 부합한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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