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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는 인생의 멘토로 생각한다는 뜻이니 영광이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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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22면

신랑·신부를 소개하고, 축복과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결혼 서약을 받고…. 한국 결혼식에서 주례는 결혼의 주재자이자 증인이다. 성혼 선언문에 서명하는 이도 주례다. 다양한 인연으로 주례를 선 이들의 경험담을 들어봤다.

명사들이 말하는 주례의 의미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만난 은인
박창일(64) 연세대 의료원장은 15년 전 첫 주례를 섰다. 1995년 봄, 이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은 황영택(43)씨가 약혼녀 박금주(40)씨와 찾아왔다. “저희 결혼식 올리게 됐습니다. 선생님께서 주례를 맡아주세요.” 황씨는 결혼식 날을 받아 놓고 일터에서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됐다. 예비 부부는 치료와 간호에 매달리느라 결혼을 3년간 미뤘었다.당시 40대 후반이었던 박 원장은 “아직 주례 설 나이가 아닌데…”라며 망설이면서도 ‘이들 부부가 어려움을 이겨내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내가 진심으로 축복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수락했다. 황씨는 특히 치료에 적극적이었 다.

박 원장이 국내에 도입한 휠체어 테니스팀에서 운동을 배워 나중엔 국가대표까지 지냈다. 황씨는 “아픈 몸을 고쳐주시고 새 인생을 살아갈 용기를 주신 선생님이 저희가 평생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갈 말씀을 전해주실 적임자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환자와 의사로 인연을 맺어 주례를 선 또 다른 커플은 가수 강원래·김송씨 부부다. 강원래씨가 치료를 받을 때 부인이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모습을 보면서 두 사람의 사랑에 감동해 기꺼이 주례 요청에 응했다고 한다. 박 원장은 “지금도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아름답게 살고 있다고 소식을 종종 전해온다”고 했다.

의사가 환자의 주례를 서는 일은 흔치 않다. 재활의학 전문의인 박 원장은 좀 다르다. “장애인의 재활치료는 병원 안에서의 치료뿐 아니라 사회 적응 훈련까지 포함되는데, 그 과정에서 환자와 가까워지고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환자와 제자 20여 쌍의 주례를 섰다. 박 원장에게 주례는? “영광이죠. 저렇게 살고 싶은, 마음의 표상이라는 뜻 아니겠어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됩니다. 주례사는 번지르르한데 제가 실천을 안 하면 안 되잖아요.”

"지구를 지키지 말고 소리를 지켜라"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73) 집행위원장은 올 초에도 주례를 섰다. 신랑은 쌍둥이 중 형인데, 1년 전 동생의 결혼식도 그가 주례를 섰다. 놀라기는 이르다. 그는 남매, 심지어는 부녀의 결혼식에 모두 주례를 선 인연도 있다. “테니스 모임에서 함께 운동하는 친구였어요. 나보다 열댓 살쯤 아래인 그 친구가 늦장가 갈 때 주례를 섰죠. 아마 그게 처음이었을 겁니다. 나중에 그 딸의 주례도 섰고요.”

그는 1996년 제1회 때부터 지금까지 15년째 부산영화제를 이끌고 있다. 영화계 안팎의 인맥이 도탑기도 하려니와, 그가 주례 선 결혼식의 다양함은 그 이상이다. “자주 다니던 술집 웨이터, 아파트 경비, 우리 직원들, 영화제 자원봉사자….” 영화계에서도 한석규씨 같은 톱스타의 결혼은 물론이고 촬영·조명·제작 등 스태프나 그 자제들의 결혼에 두루 주례를 섰다. 영화제 심사 등으로 해외출장이 잦은 요즘도 그는 일정이 맞는 한 주례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

많은 주례를 서면서도 그의 주례사는 매번 퍽 꼼꼼하 다. 김 위원장의 주례로 90년대 초 결혼한 채윤희(영화마케팅사 올댓시네마) 대표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절도 아닌데, 저에 대해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고 말씀해 주셔서 감동하고도 놀랐다”고 돌이킨다. 조금 다른 준비를 할 때도 있다. 2006년 영화감독 장준환·배우 문소리 커플의 결혼식이 그랬다. 언론에 공개하지 않은 것은 물론 가까운 친지들만 참석한 자리였다. “영화인은 나 혼자였어요. 순전히 가족뿐이고. 그래서 두 사람을 잘 아는 젊은 감독들한테 미리 코멘트를 받아다 대신 읽어 줬죠. ‘지구를 지키지 말고 소리를 지켜라’(‘지구를 지켜라’는 장준환 감독의 영화 제목) 같은 내용이었요.” 식장에 폭소가 터졌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준비한 코멘트를 앨범으로도 만들어 전해줬다. 주례사가 고스란히 결혼 선물이었던 셈이다.

통역 필요한 외국인 주례는 시간 두 배
“When those days get tough, grab your partners hand and say we can do it together….”(어려운 일이 닥치면 서로 손을 잡고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세요….)
2007년 그렉 필립스(55) 한국닛산 사장은 직원 결혼식에서 처음으로 주례를 맡았다. 그가 영어로 주례사를 하면 통역이 한국어로 옮기느라 시간이 두 배로 걸렸지만 하객석은 미동도 없었다. 미국인인 그는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20년째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닭살 멘트’를 곁들여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는 “예전에는 양가 어른들이 주례를 정했다면, 요즘은 젊은 부부 스스로 주례를 선택하는 것 같다”며 “그래서 나 같은 외국인에게도 기회가 왔나 보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18년간 살면서 결혼식에 많이 다녀봐서 주례가 그리 낯설진 않다. 대우·혼다·닛산 자동차에서 임원을 지낸 그는 “수천 명 앞에서 강연도 해봤지만, 몇 백 명도 안 되는 결혼식이 훨씬 더 떨리더라”고 했다.그의 주례 경험은 두 번이다. 두 경우 모두 결혼식 한 달 전부터 주례사를 쓰기 시작했다. 성경과 여러 문헌에서 결혼과 사랑에 관한 의미 있는 구절을 찾았다. 원고가 완성되면 부인과 아이들이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는 연습을 했다. 마지막에는 통역사와 호흡을 맞췄다. 이렇게 공들이는 이유는 “내가 아니라 신랑·신부를 위한 날”이기 때문이다. 신랑·신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주례사를 예쁘게 프린트해 건넨다. 결혼 앨범에 끼워 놓고 마음속에 새기며 살라는 의미에서다. “결혼식 날엔 신랑·신부가 주례사를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울 거예요. 저도 제 주례사 중에 ‘즐겁게 살라’라는 한마디밖엔 기억이 안 나거든요.”(웃음)

필립스 사장에게 주례는? “상호존중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내게 주례를 부탁했고, 나는 그들 인생의 가장 특별한 날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 평생 기억되는 거죠. 성혼 선언문에 서명하는 사람이 주례라는 것 아시죠?”
 
"연애는 드라마 결혼은 다큐멘터리"
“먼저 왜 나한테 주례를 부탁하는지 물어봐요. 어려울 때 얘기를 많이들 하더군요. 힘들 때, 앞날이 불투명할 때 해준 말이 격려가 됐다고.” 방송인 주철환(55)씨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40대 초반에 주례를 처음 섰다. 방송사 FD로 일하던 청년이 ‘제가 결혼하면 주례 서 주실 거죠’하는 말에 ‘당연하지’라고 답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후 그는 200쌍이 넘게 주례를 섰다. 주례를 부탁한 이유가 대개 그가 건네줬던 격려의 말이듯, 그가 주례사로 들려주는 말도 격려의 덕담이다. 최근 후배 PD의 결혼식에서는 “결혼생활에 사력을 다하라”는 주문을 했다. 서로 ‘능력’을 발휘하고, ‘매력’으로 끌어당기고, ‘노력’으로 함께 나아가고, 매사에 ‘협력’하라는 중의적 의미다. 그의 말 빚는 솜씨가 드러나는 주례사다.

그는 “연애가 드라마라면 결혼생활은 다큐멘터리”라면서 “결혼식은 엔터테인먼트인데, 다만 일생의 다짐을 하는 자리인 만큼 즐거움과 경건함이 고루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주례의 역할이라는 얘기다. 그에게 주례는? “멘토, 혹은 길잡이로 생각한다는 의미거든요. 나를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 인연의 깊이를 생각하면 거절하기 힘들죠"가 주례 선 보람을 가장 크게 느끼는 순간은 가족을 이룬 모습을 확인할 때다. 처음 주례를 선 청년이 나중에 아기와 찍은 가족사진과 결혼식 사진을 함께 가져왔을 때도, 지난해 방송인 박경림씨가 첫아기 돌잔치를 한다며 불렀을 때도 그랬다. 박씨는 그의 주례로 2007년 결혼했다. “내가 이 가정의 출발에 증인이 된 거잖아요. 마치 아기의 대부 같은 느낌이 들죠.”

선택 존중하며 주례도 젊어져
요즘은 더 젊은 주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웅진(45·좋은만남 선우) 대표도 지금까지 10쌍 가까이 주례를 섰다. 더구나 처음 주례를 섰을 때는 30대 후반이었다. 지금도 같이 일하는 직원의 결혼식이었다. “일 잘하는 직원이었거든요. 꼭 잡아야 할 사람, 내 인생에 계속 이어질 사람이라는 생각에 주례를 맡았죠.” 그는 결혼정보업이라는 새로운 사업분야를 개척해 지금처럼 회사를 키워 왔다. 직업 덕분에 흔치 않은 경험도 했다. 2002년 70대 신랑·신부의 결혼식에 주례를 선 것이다. 효도미팅, 즉 노인층을 위한 공개 만남을 통해 결혼까지 이른 두 어르신이 그에게 주례를 부탁한 것이다.

“두 분은 신혼이다, 신혼처럼 사시라는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나네요.”그 자신의 결혼식은 검정고시 학원의 선생님이 섰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고교 검정고시를 거쳐 나중에 대학에 진학했다. 주례를 서준 선생님은 그가 19년 전 지금의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사무실로 방 한 칸을 빌려준 분이기도 하다. 그는 달라진 결혼문화가 주례에도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예전에는 당사자보다는 부모가 주례를 정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면, 지금은 그 반대예요. 배우자 선택 등 결혼문화 자체가 부모보다는 당사자 중심이 됐기 때문이죠. 당사자가 부탁하는 경우가 늘면서 직장상사 등 나이가 많지 않은 주례가 늘어났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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