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1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18. 유행성 출혈열

새로운 연구주제를 찾아 골몰하던 나는 월터리드 미 육군병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월터리드 미 육군병원의 바이러스 연구부장으로 부셔대령이 있었는데 마침 그는 미네소타대학 유학시절 나의 지도교수였던 쉬러교수 아래서 나에 이어 두 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따지고보면 나의 대학원 후배였던 셈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인맥은 역시 중요했다.

그는 내게 유달리 친절하게 대했다.그러면서 고민하던 내게 왜 유행성출혈열(出血熱)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일본에 있는 극동지부 미 육군연구개발연구소에 연구비를 신청해보라는 귀띔도 해주었다.

유행성 출혈열은 만주와 한국에서 유행하던 일종의 괴질이었다. 41년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제국 관동군에게 1만2천여명이 발생해 2천여명이 사망했으며 6.25전쟁 당시 유엔군에서도 3천2백여명이 발생해 수백명이 사망했다.

유엔군사령관의 통역관이자 전학술원회원이며 영문학자인 조성식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전투중 발생한 부상자보다 괴질에 걸린 환자가 더 많아 유엔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연일 대책회의가 열릴 정도였다고 한다.

고열과 함께 심한 복통이 생기고 얼굴과 목.눈의 점막 등에 혈관이 터져 생기는 출혈성 반점이 나타나는 이 괴질은 사망률이 10%를 웃도는 치명적 질환이었다.

오죽하면 이 괴질에 대해 '한국형 출혈열' 이란 유쾌하지 못한 병명이 부쳐지기도 했겠는가. 당시 북한과 중공은 되레 유행성 출혈열이 미군이 뿌린 세균전 때문에 발생한 괴질이란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숱하게 많은 학자들이 괴질의 원인을 밝혀내려고 매달렸으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괴질인데다가 병명조차 한국형 출혈열이니 한국인 학자가 연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나는 부셔대령의 충고를 받아들여 연구주제를 일본뇌염에서 유행성 출혈열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70년 5월 연구계획서를 작성해 일본 극동지부 미 육군연구개발연구소에 신청했다.

결과는 의외로 신속했다. 3개월만인 8월 연구비를 지원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70년 11월부터 73년 10월까지 3년 동안 4만달러의 연구비가 책정됐다.

예의 차량 구입비가 딸려 나왔다. 문제는 일본뇌염과 달리 유행성 출혈열은 38선 부근 비무장지대에서 흔히 발생하는 질환이므로 군 지역을 자주 왔다갔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연구용이라 하더라도 민간차량의 통행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심정으로 차량통행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 미군 차량을 구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기한이 지나 폐기처분하는 차량을 담당하는 미군 담당자를 직접 찾았다. 담당자인 상사에게 위스키 한 병을 들고가 여차저차한 이유로 미군 번호판이 달린 차량이 필요하다고 부탁했는데 위스키란 꽁수가 통했는지 의외로 흔쾌히 군용 앰뷸런스 한 대를 사용할 수 있는 승낙을 얻어낼 수 있었다.

연구비도 따냈고 차량도 구했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연구에 몰두하는 일만 남았다. 나는 일본뇌염을 연구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출혈열 연구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기로 하고 71년 4월 파나마로 떠났다.

파나마에 있었던 미 육군 중미의학연구소의 존슨소장은 볼리비아 출혈열을 세계최초로 발견한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당시 오산의 미 공군비행장에서 군용기를 타고 떠났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우쭐해진다. 내게 미 육군에서 GS15란 계급을 부여했는데 이는 당시 대령급 대우였다.

1등석 자리가 예약됐음은 물론 미군상사가 비행장에서 나를 직접 영접해 세관수속을 대신하고 짐 검사도 하지 않았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