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페르시아 기행] 1. 제국 건설한 고레스 와의 무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이란은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후, 활발하게 진행되던 고고학 발굴을 금지시켰고 특히 서양학자들의 방문을 극히 제한하고 있다.

7세기 이슬람 종교 이전의 문화는 극복돼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에서 쐐기문자 등 고대 근동어(近東語)를 전공한 배철현(38) 박사는 한국 창조사학회와 함께 이란 당국의 특별허가로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주요 유적지를 탐사했다.

고대언어학자 배박사가 돌아본 '동서양 문명의 다리' 페르시아 기행을 시리즈로 싣는다.

다음회부터는 매주 화요일 문화 종합면에서 만날 수 있다.

중동의 허리 자그로스 산맥에 자리잡은 이란은 국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역사 박물관이다. 인류 최초의 세계 제국 페르시아(BC 559~333)로부터 시작되는 장구한 역사동안 이란의 영토에는 동서양의 비바람이 끊임없이 소용돌이 쳤다.

동양으로 뻗어 가려는 유럽의 야망과 서양으로 진출하려는 아시아의 염원이 이란의 옛 땅인 페르시아에서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악수하였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시작된 동양의 문명은 이곳 페르시아를 거쳐 지중해 너머의 그리스로 전달됐고, 그곳을 중심으로 뒤늦게 꽃 피운 서양문명의 밑거름이 됐다.

페르시아는 동서 문명의 다리였던 셈이다. 이란의 곳곳에 널려있는 유적들이 그런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첫 수도는 파사르가데. 이란의 남쪽 사막 한가운데에 그 흔적이 있다. 테헤란에서 비행기를 타고 시라즈에 도착한 뒤 버스로 다시 사막에 뚫린 비포장도로를 87㎞ 정도 달렸다.

이란의 7월은 섭씨 40도를 웃도는 살인적 더위다. 터덜거리며 두 시간쯤 달려 몸이 거의 녹초가 될 무렵, 파사르가데를 알리는 작은 표지판이 나타났다.

파사르가데는 시조(始祖) 고레스(Cyrus)가 페르시아를 세계제국으로 만들기 위한 전초기지로 세운 수도다.

고레스는 BC 576년에 당시 메대국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봉신이었던 캄비세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BC 559년 반란을 일으켜 메대 왕국을 전복시켰다. 당시 메대 왕국의 속국이었던 아르메니아.카바도기아.파르티아.드랑가니아.아리아.코라스미아.박트리아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레스의 업적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유화정책이다. 당시 바빌론의 경우 예루살렘에서 끌려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노예생활을 해야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고레스는 전쟁에 승리하자마자 칙령을 발표, 이들을 해방시켰다.

성서의 예언자 이사야는 그를 '야훼의 목자' '메시아' (이사야 44장 28절과 45장 1절)로 불렀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헌도 그를 '온 세상의 왕, 지구 네 축의 왕' 이라고 떠받들고 있다.

고레스의 무덤은 파사르가데의 남쪽 끝, 동서양을 잇는 '왕의 대로' 선상에 있다. 외형은 거의 완벽하게 보전돼 있었다.

무덤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밑바닥 높이가 5.5m인 모두 6개의 사각 계단형으로 이뤄져 있고, 그 위에 높이 5.5m인 석실이 있다.

이란 관리인의 허락을 얻어 무덤 위로 올라갔다. 꼭대기 석실에는 창문이 달린 이중문이 안으로 이어져 있다. 지금은 텅 비어 있는 그 안에 고레스의 금빛 관과 그의 시신이 있었을 것이다.

BC 325년 세계 제패에 나선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에 찾아와 무덤이 도굴된 것을 보곤 몹시 분개했다고 한다.

그 리스 역사학자 아리안이 쓴 '아나바시스' 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이미 도굴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무덤 근처에 있던 고레스의 궁궐에서 6만t의 금괴를 가져갈 수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레스는 이런 도굴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무덤 안에 적었다고 전한다.

"인간들아! 나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캄비세스의 아들 고레스다. 나는 아시아의 주인이다.

나와 내 기념 건물들에 원한을 품지 말아라. " 고레스의 무덤은 크기나 장식 등에서는 세계제국 창건자라는 위엄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수수했다.

그러나 건축양식에서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잘 반죽된 듯 조화를 이루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돌이 귀하기 때문에 일찍이 진흙벽돌로 건물을 지었다. 벽돌을 굽듯이 진흙을 다져 견고성과 내구성을 높였고, 역청을 이용해 계단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이러한 건축양식을 '지구라트' 라 부른다.

그러나 이 지역은 돌이 비교적 많은데도 불구, 그때까지 3천년간 내려온 메소포타미아 신전 건축 양식이 그대로 등장하고 있다.

6개의 계단으로 주초를 이루는 지구라트는 근처의 유적지 '초가 잠빌' 이나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지방에서도 숱하게 만날 수 있다. 고레스 무덤은 그것들의 축소판인 셈이다.

밑받침이 동양의 건축양식이라면 석회암 석실은 서양의 건축양식이다. BC 547년 리디아와 이오니아 정벌후 이곳들로부터 석공들을 데려왔다. 그들을 통해 석실이 만들어졌다.

BC 1100년 아나톨리아(현재 터키)는 그리스로부터 온 이오니아 사람들을 중심해 새로운 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나톨리아에서 히타이트 사람, 아시리아 사람, 페니키아 사람, 이집트 사람들의 문화와 접촉하여 새로운 문명인 이오니아 문명을 태동시킨다.

위대한 철학자 탈레스와 역사학자인 아낙시맨, 아낙시메네스를 배출해내고 과학적인 관찰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건축 양식을 이루어 내는데 그것이 바로 이오니아식이다.

이런 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에베소에 있는 아르테미스의 신전 양식이 바로 고레스의 무덤의 석실에 축약되었다.

동양과 서양이 수천년동안 나름대로 키워온 이질의 문화가 기원전 6세기 고레스 무덤에서 만난 것이다.

양쪽의 문화가 절제된 형태 속에 이토록 절묘한 조화를 이뤄냈다는 사실에서 당시 페르시아 제국에선 동서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그 문화들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어우러져 새로운 세계문화로 꽃피운 것이다.

배철현 <한님성서연구소 연구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