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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어떤 방계 라인의 무모한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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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저는 500대 기업 쯤에 속하는 한 제조업체의 회장님 외손자 L입니다. 그러니까 맏딸의 큰 아들이죠. 외할아버지이신 회장님은 어렸을 때부터 절 무척 귀여워하셨습니다. 첫 손자기도 했지만, 삼촌들이 아들을 낳지 못한 관계로 더욱 더 그러하셨죠. 대학 졸업 후 S그룹에 취업을 해서 한 2년 정도 다녔을까? 어느 날, 회장님이 절 부르시더니,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도와달라는 겁니다. 의사이신 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외할아버지의 간청을 거절하기도 뭐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회사생활은 첫날부터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사장인 큰 삼촌과 부사장인 작은 삼촌이 처음부터 직급을 높여주려고 하는 걸 마다하고 과장 직급을 받았는데, 부장님이 일을 안 주시는 겁니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정말 돌겠더군요. 그래서 일을 찾았죠. 이것저것 찾아서 사소한 건의도 해보고, 조금 굵직한 신규 사업 제안도 해보고. 그러면 윗분들을 그냥 통과해서 곧바로 부사장인 작은 삼촌에게 보고되는데, 결과는 늘 ‘보류’. 외할아버지는 이런 내 사정을 알기나 하시는지, 어쩌다 회사에서 마주치면 ‘잘하고 있는 거지?’하며 등만 두드려 주시더군요. 형님처럼 생각하며 지낸 작은 삼촌인데, 자꾸 ‘보류’를 때리니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회장님에게 곧바로 직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효과는 조금 있어서, 과거와 달리 뭔가 반응들이 오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올린 신규 프로젝트를 회장님은 빨리 추진하라고 하시고, 사장인 큰 삼촌과 작은 삼촌은 안 된다고 하시고, 결국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죠. 회장실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저를 지나쳐 나가던 삼촌들의 굳은 표정!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한 1년 지났을까? 어느 날 회식자리에서 술이 잔뜩 취한 K상무가 삼촌들도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외치더군요. ‘전 이제부터 과장님 라인이 되기로 했습니다.’ 회장님이 제가 건의한 신규 프로젝트를 받아들여 자~알 진행되면서, 제게 힘이 좀 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지금까지 전 계속 삼촌들의 눈총과 견제를 감내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고 말았습니다. 삼촌들과 관계도 예전 같지 않고, 가족모임의 분위기도 많이 어색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 먼저 남들은 취업을 못해서 속이 타는데 L과장은 그런 걱정은 없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 ‘성골’의 변두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로얄 패밀리니까요. 그런데 처한 상황은 거의 최악이군요.

당신의 긴 사연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사연은 길지만 여전히 확인해야 할 점이 많은, 그야말로 의문투성이의 사연이었다는 겁니다. 솔직하게 다 털어놓지 않은 뒷이야기도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고요. 하지만, 일단 당신이 보내온 사연을 토대로 나름의 가설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의문 : 왜 들어갔을까?

먼저, 왜 그 회사에 들어갈 생각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뭔가요? 삼촌들 이후에 후계구도가 불분명할 것으로 보고, 그 회사를 접수할 생각이었습니까? 삼촌들에게 아들이 없더라도 딸들은 있을 텐데, 그 딸들이나 사위들에게 먼저 물려줄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에, 묻는 겁니다.

만약에 접수할 생각으로 들어갔다면, 지금 당신이 겪는 인간적 고통은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 투정을 부리진 마십시오. 더욱이 당신은 앞으로도 더 많은 갈등과 고뇌의 세월을 보내야 할 겁니다. 또! 결국은 두 삼촌을 회사에서 몰아내고 당신이 권좌를 쥐어야 하는 최후의 순간이 올 텐데, 그때는 정말 ‘야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안 될 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의문 : 과연 가능할까?

두 번째로 드는 의문은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겁니다. 당신이 처한 객관적 조건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 답답한데, 당신은 그 회사 주식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습니까? 또 외할아버지 회장님과 큰 삼촌 사장님, 작은 삼촌 부사장님의 지분 구조는 어떻게 되나요?

가족 지분 가운데 아직까지 회장님이 과반 이상으로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면, 당신에게 그나마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삼촌들에게 과반 이상의 지분이 넘어갔다면 싸움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혹시 어머니가 지분이 조금 있더라도 그것으로 삼촌들에게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일 테니까요.

또 다른 경우로, 회사가 아주 도산할 위기에 봉착했다면, 그것이 기회가 될 수는 있을 겁니다. 대규모 감자 이후, 당신이 자본을 끌어 들여 회사를 인수하는 방법이 있을 테니까요. 물론, 그것도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 잘 아시죠?

#세 번째 의문 : K상무는 대체 뭐하는 자인가?

설마 요즘 K상무와 가까이 지내는 건 아니겠죠? 도대체 상무가 될 때까지 뭘 배웠는지 의심이 가는 자입니다. 정말로 당신에게 줄을 설 생각이었다면, 정말로 당신을 도와줄 생각이었다면, 조용히 밖에서 따로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해야지. 누구 물 먹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입이 헐한’ 또는 ‘술기운이 입으로 뻗치는’ 자들은 줄을 서려 해도 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신이 회사를 접수할 계획이라면, 그것은 혁명이기 때문에, 혁명을 하기에 적합한 인물들로 줄을 세우기 바랍니다.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밀유지’입니다. 비밀이 사전에 새나가면 끝’이기 때문이죠. 만약에 그런 자들이 없다면, 혁명의 꿈을 접어야 할 겁니다. K상무 같은 자는 지나가는 똥개나 주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의문 : 외할아버지, 정말 믿을 수 있습니까?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그 외할아버지 회장님. 정말 믿을만한 분입니까? 회사를 창업한 그 열정과 실력에 의문을 갖는 게 아닙니다. 당신에 대한 사랑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외할아버지의 ‘늙음’을 의심하는 겁니다. 혹시 치매 증상이 오시진 않으셨나요?

당신을 불러들인 외할아버지의 생각은 비교적 단순하다고 봅니다. 나이가 드니 외롭기도 하고, 외손자가 회사 다닌다고 하는데, 그룹이라고는 하지만 말단 직원이 월급을 받아야 얼마나 받을까 싶기도 하고, 그냥 밑에 데리고 있으면서 말동무도 하고, 용돈삼아 월급이나 넉넉하게 챙겨주고 싶은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당신도 그런 영감님의 눈높이에 맞춰 회사생활을 했더라면 아무 일 없었을 겁니다. 그냥 할아버지 모시고 놀러나 다니고, 삼촌들하고도 잘 어울리면서 시키는 일이나 하고. 만약에 그렇게 생활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은 후계자 게임을 시작했고, 그 게임에서 이기려면 회장님이란 변수는 아주 중요합니다. 회장님이 여전히 지분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은 아닐 수 있지만, 결국 당신은 회장님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해야 할 겁니다. 삼촌들을 택할 겁니까 아니면 절 택할 겁니까? 그 순간, 회장님이 당신을 택할까요? 글쎄요?? 그래서 회장님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물은 겁니다.

#다섯 번째 의문 : 삼촌들이 바보인가요?

이미 지분 상당부분이 삼촌들에게 넘어갔을 것으로 보이지만, 설령 지금 지분이 별로 없더라도 이 게임은 삼촌들에게 절대 유리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회장님은 지분을 아들들에게 넘겨줘야 할 부담을 느낄 겁니다. 막대한 상속세에 회사가 휘청거릴 일도 걱정스럽고, 제사를 지내줄 아들들의 요구도 그렇고, 아내도 아들들 편이고.

설령 지분 이양을 다 못하고 돌아가시더라도 아들들이 여러모로 유리합니다. 일단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 사정을 잘 알고, 당신의 어머니에게 지분이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분들 지분보다는 적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미 당신을 거북하게 여기기 시작한 삼촌들이 그때까지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서선 당신을 ‘왕따’ 시키려 들 가능성이 높고, 그것은 관철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할아버지의 힘은 떨어지는 추세인 반면에, 삼촌들은 그 반대기 때문입니다. 물론, 삼촌들이 정말 바보들이라서 회사를 완전히 들어먹고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앞서 잠시 검토했듯이 삼촌들이 다 말아먹고 난 뒤에 회사를 인수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일, 외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든다는 뜻에서는 기특한 일이지만, 그런 노력을 들여 빈껍데기만 남은 회사를 인수할 가치가 있는 지는 생각을 더 해봐야겠죠?

이제 조금은 길게 늘어진 이야기를 정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만약에 회사를 옮기기 전에 제게 문의를 해왔더라면 말렸을 겁니다. 들어가서 당신이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외할아버지 회사에서 ‘Que sera sera’로 편하게 지내는 것 말고는 말이죠.

당신의 비극은 그렇게 지내질 못했다는 것인데, 당신의 의도한 것이 무엇이었건 간에 결국은 삼촌들이 당신의 행보를 후계자 게임으로 인식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한번 그렇게 인식된 이상 당신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습니다. 그대로 ‘고!’하거나, 홀연히 떠나거나.

가설을 전제로 전반적인 상황을 점검해보았지만, 이 게임에서 당신이 이길 확률은 아주 희박합니다. 더욱이 게임에서 이기려면 엄청난 정력을 쏟아 부어야 할 최악의 구조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계 라인이 가진 한계 때문입니다. 이건, ‘고!’를 선언하는 순간, 당신의 인생도 ‘막장 드라마’로 돌입하는 걸 의미합니다.

그런 열정을 차라리 본래 근무하던 S그룹에서 쏟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회사에서 인정받고 외할아버지는 물론 삼촌들로부터 인정받고. 그렇게 상당한 역량을 검증받은 뒤에, 외할아버지가 아닌 삼촌들이 같이 일하자고 제안을 했을 때 회사를 옮겼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때도 들어갈 지 말 지는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할 일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이미 지난 이야기를 이제 와서 다시 할 필요는 없고, 마지막으로 제가 드리고 싶은 조언은 ‘당장 그 회사를 떠나라’라는 겁니다. 다시 S그룹으로 돌아가지는 못하더라도, S그룹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재취업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창업을 해서, 외할아버지 회사보다 더 큰 사업을 벌여보시기 바랍니다. 남의 사업이 아닌 내 사업으로.

이종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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