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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두만강 대탐사] 9. 강은 대륙을 열고 있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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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9. 1만여 돌무덤…장대한 고구려혼

지레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지안(集安)이 그토록 위대한 고도(古都)인 줄 몰랐다.

고구려 7백년 역사에서 4백년간 도읍지였던 국내성(國內成)이 거기 있는 줄은 책으로 배워 알고 있었지만 사방 2㎞의 국내성 성벽 안이 지안의 다운타운인 줄은 가보고야 알았다.

나는 이렇게 늦게서야 지안을 찾아온 것이 무척 후회스럽고 죄스러웠다. 지안을 보지도 않고 고구려 문화를 가르쳐 온 것이 민망스럽고 미안했다.

지구상에는 무수한 나라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그중 7백년이라는 긴 세월을 영위한 나라는 고대의 몇 나라 외외는 없다.중국역사에서도 주(周)나라 이후엔 없었다.그런 고구려였다.

더욱이 고구려는 압록강을 젓줄로 하여 드넓은 만주벌판과 비옥한 한반도의 절반을 차지한 강대국이었다.그것을 증언하듯 서 있는 것이 광개토대왕비이며,광개토대왕의 부하 장수였던 모두루(牟頭婁)의 무덤에는 8백자의 묘지명(墓誌銘)을 쓰면서 "고구려가 가장 성스러운 나라는 것을 천하사방이 다 알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 고구려의 국내성이 있던 지안이었지만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지안을 버리고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그러니까 지안은 고구려 역사의 한 절정에 도달한 순간 역사 속에서 자기 임무를 다한 셈이었다.

이후 지안은 고구려시대부터 변방의 소읍으로 전락하였고 다시는 역사 속에서 부상하지 못한 채 오늘날은 압록강 건너 북한의 만포(滿浦)와 마주하고 있는 국경의 도시로 되었다.그것이 지안의 역사이고 운명이다.

그리하여 지안에는 고구려의 영광을 말해주는 '살아있는 자'의 유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화려했을 궁궐은 허물어져 시내 중심가로 되었고 무너진 성벽은 단독주택의 뒷담벽이거나 아파트단지의 담장으로 되어 있다.

그 옛날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고 자부했던 그들이 제사를 지내던 신전터가 어디인지 알 수 없고 그렇게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였다던 고구려인들의 연회장터나 놀이터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다.그 흔한 절 하나 남아 있는 것도 없고 절터로 보존된 곳도 없다.

오직 남은 것은 '죽은 자'를 위한 유적,무덤뿐이다.그러나 고구려인들의 이 죽음의 유적은 정말로 장대하고 정말로 위대한 것이었다.지안에는 현재 1만1천3백기의 고구려 고분이 남아있다.경주에 고분이 많은 것 같아도 그 숫자는 1백55기이고,그 많던 서울 석촌동의 백제고분이 겨우 10기 남아 있는 것에 비하면 그 유적의 보존이 차라리 신기하다.

고구려인들은 죽은 자를 하늘나라에 보내기 위하여 진실로 산자의 정성을 다하였다.천추만세묘에서 나온 전돌에는 '천추만세 영고(千秋萬歲 永固)'라고 새겨져 있다.그들의 원대로 천추 만세토록 무너지지 않고 길이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지안을 답사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이 사실에 주목하여야 하고,바로 그 죽음의 유적을 순례함으로써 고구려의 기상과 혼을 읽어 보게 된다.사실상 세계의 어느 유적지도 이처럼 비장감 감도는 곳은 없다.

지안과 만포를 가로지르는 압록강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른다.지안 시내 뒤로는 우산(禹山)이 우뚝하고 우산 서쪽으로는 환도산(丸都山)과 칠성산(七星山)이 둘러있는데 바로 그 산 사이를 비집고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계류가 통구하(通溝河)이다.그래서 지안의 고분들은 보통 통구고분군으로 불려져 왔던 것이다.

고구려의 고분들은 산비탈에 무리지어 있다.우산하(寓山下)고분군에 3천9백기,칠성산고분군에 1천7백기,지안 서쪽 마선구(麻線溝)고분군에 2천5백기 등이다.그 무리지어 있는 무덤을 찾아가는 것이 지안답사다.

음식도 순서대로 먹어야 맛있듯이,답사에도 차례가 있다.지안을 답사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산성하고분군부터 봐야 한다.

산성하고분군은 고구려 돌무지무덤,이른바 적석총(積石塚)의 진면목을 보여준다.현재 지안의 고구려고분 1만1천3백기 중 약 45퍼센트가 돌무지무덤이고 그 나머지는 흙무덤,이른바 봉토분(封土墳)이고 그중엔 벽화고분도 있다.

고구려 고분 중 죽음의 건축으로서 비장한 멋을 보여주는 것은 기단식적석총이다.보통 사방 20∼30m의 석축을 3단으로 올려쌓고 그 위에 강자갈을 피라밋형식으로 쌓아 높이가 7∼9m 된다.산성하고분은 바로 이 기단식적석층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고 그 무덤의 행렬이 장대하다.그 사잇길을 걷자면 고구려의 흙과 체취가 느끼지 말라고 해도 절로 온몸에 스며든다.

나는 이 산성하고분군을 산위에서 내려다보고 싶었다.그래서 그 다음 코스인 환도산성 답사 때는 오른쪽 과수원 비탈을 타고 올라 그 장엄한 무덤의 행렬을 보았다.이날 이 순간까지도 지안 답사의 최고 장관은 이것이었다.

세번째 코스는 역시 지안고분군의 하이라이트가 다 모여 있는 우산하고분군을 답사하는 것이다.'동방의 금자탑'이라는 장수왕의 무덤인 호태왕릉,달신과 해신의 만남이라는 벽화로 유명하며 무덤이 마치 투구 같이 생겼다는 오회분(五회墳)의 제4호와 5호,그리고 춤무덤,씨름무덤,세칸무덤 등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현재 벽화무덤으로 공개되고 있는 것은 오회호분 제5분뿐이었지만 그 하나만으로도 고구려 벽화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답사의 여흥으로 지안에서 압록강하류쪽 마선구고분군으로 가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천추만세묘,서대묘(西大墓)를 보면 도대체 고구려사람들은 무슨 맘 먹고 이토록 견고하고 무지막지한 규모로 무덤을 만들었나 감탄과 질문을 거듭하게 된다.마선구고분은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끝없이 이어졌다.

이때 나는 집집마다 곳간이 지상에서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아 저것이 부경(나무 木+孚 京)이구나!"하며 고구려 유적을 본듯이 반가와했다.지상에서 떠 있는 창고라 할까.중국의 사서 '삼국지'의 고구려전을 보면 "집집마다 부경이 있었다"고 하였고,일본 법륭사(法隆寺)의 정창원(正倉院)건물이 바닥에서 떠 있는 것도 고구려식인 것이었다.전통의 생명력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이었다.

지안에 머물면서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시내를 산책하며 국내성의 무너진 담장 석축을 따라 무작정 걷기도 했다.그리고 삼륜모타차(三輪毛打車)라는 딸딸이 택시를 타고 압록강변으로 나가 만포시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기도 했다.

마침 추석날인지라 보름달이 압록강에 거꾸로 비치는데 강여울에 그림자진 만포 행길가의 포플러나무들이 얼마나 애잔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이때 술집 아줌마는 우리의 심사를 녹이려고 작정을 한듯 카세트 볼륨을 한껏 올려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최백호의 '내 마을 갈 곳을 잃어'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 달빛아래 그 노래를 들으며 우리에게 지안은 무엇인가,그리고 반대로 중국 지안에게 우리는 누구인가를 물어보았다.중국에서는 고구려를 그들의 역사속에 포함시키고 있다.요(遼)나라 금(金)나라처럼 만주에 일어났던 그들 지방사의 하나라며 우리 한국인이 고구려를 말하고 관심갖는 것을 경계하고 또 싫어한다.

나는 그 답을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2백만명이 중국과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벌써 4대째 내려온 한 조선족은 말하기를 그들의 조국(祖國)은 중국이고,모국(母國)은 한국(조선)이라는 것이다.그래서 지안은 전혀 남의 나라에 온 것 같지가 않은 것이었다.

유홍준 <영남대 교수·미술사>

사진=장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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