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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겨울잠 같은 죽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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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가을이다. 불타는 듯한 단풍 산색이 아름답다. 산에 긴 그물을 쳐 놓고 동면(冬眠)하러 가는 뱀을 잡는다는 보도를 떠올리면서, 나무와 사람의 겨울잠을 생각한다.

화려하게 색이 오른 나뭇잎들을 자세히 보니,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단풍이 나뭇잎에게 있어서는 병색이요, 사색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많은 사상자를 내며 충돌하는 가운데, 예멘의 아덴항에서는 폭탄을 실은 이슬람 자살특공대가 미 해군 구축함에 돌진한 폭발사고가 있었다.

이슬람교도의 전투성이나 테러행위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그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부럽다.

지난 미.일 전쟁 때, 자살폭격하는 일본군 비행기 조종사들과 그들을 배출한 일본인들의 민족정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슬람의 자살특공대는 그보다 한술 더 뜨는 셈이다.

죽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다.

카메라나 대중 앞에서 터프가이의 멋을 내는 것은 연기이지 진정한 용맹 품격이 아니다. 선사들이 '좌탈입망(坐脫立亡)' 즉 '앉거나 선 자세로 육신의 옷을 벗는 것' 을 중요시한다.

앉아있는 폼으로 영원히 살아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닥치는 죽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일어나서 스스로 육신을 지운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죽는 모습이 남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망정 혐오감을 주어서는 안된다. 최근에 자살자가 늘어서 젊은이들의 사망률은 교통사고 다음이라고 한다.

목매달기, 약물복용, 물에 뛰어들기,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기, 피흘리기 등의 방법으로 자살하는 것은 죽음을 무서워하는 비겁자의 소행이다.

오랜 기간 죽음을 바라보기가 두려워서 짧은 시간 내에 망각의 세계로 빠져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당하게 죽음과 눈맞추기를 피하지 않으면서 자살하겠다면 성당.교회, 또는 사찰에 가서 1백일 동안 단식 기도를 해 보라. 눈을 크게 뜨고 삶과 죽음의 진실한 모습을 관찰해 보라. 틀림없이 죽음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새로운 경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죽음 보기를 겁낼 필요가 없다. 죽음은 일종의 긴 겨울잠이요, 휴식이다. 우리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잠을 잔다.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더라도 밤잠을 자고 나면 다음날이 온다. 뱀은 겨울에 더 긴 잠을 잔다.

죽음도 그와 같다. 단지 죽음의 경우에는 '잠들기 전의 나' 와 '깨어난 다음의 나' 가 다른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옷이나 차나 집을 바꾸고 나의 과거 생과 미래 생을 다 기억하지 못한들 무슨 상관이 있는가.

숙명통(宿命通)으로 모든 전생 업을 알면 좋겠지만 몰라도 괜찮다. 원리만 이해하면 되지 백과사전을 낱낱이 외울 필요는 없다.

인간 게놈지도의 해독으로 수명이 연장될 수는 있어도 영원히 한 몸으로 살 수는 없다. 히포크라테스가 많은 사람을 치료했지만 자기도 병에 걸려 죽었듯이 수명 연장법을 실용화할 사람도 또한 죽을 것이다.

우리의 움직임을 후세에 전하는 역사가도 죽을 것이요, 그것을 읽고 기억할 후대 손손도 또한 죽을 것이다.

밤잠이나 겨울잠의 휴식쯤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 이외의 것으로 깨어난 나를 살려고 해야만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죽음까지 삶의 일부로 소화할 수 있다.

석지명 <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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