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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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0. 13일의 금요일

식료품점에서 만난 여성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말을 걸었더니 한국에서 온 간호사들이라고 했다.

그것도 내가 몸담고 있던 서울대병원에서 온 것이 아닌가 그들 역시 우리와 비슷하게 간호학과 교수요원 양성 프로그램으로 선발돼 미네소타대학에 왔다.

낯선 이국 땅에서 처음으로 만난 고국의 여성이라 무척 반가웠다. 김치를 담그려 채소를 사러 왔다는 그들을 내 차로 태워 기숙사까지 바래다줬다.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 김은숙은 이 때 만났다. 서울대병원 정신과 병동의 수간호사였던 아내는 내가 박사학위를 거의 마칠 무렵인 1959년 여름 유학길에 올랐다가 우연히 나를 만난 것이다.

중고차긴 하지만 내가 아끼던 스튜드베이커는 아내와의 데이트에도 각별한 역할을 했다. 요즘 신문에 보면 자동차 안에서 영화를 보는 곳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50년 전 미국에서 자동차 영화감상을 경험했던 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미시시피강을 따라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아내와 함께 가을단풍을 감상했던 추억은 아직도 기억에 새록새록 하다.

내가 아내를 만나기 시작할 무렵 학위논문 완성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59년 10월 나는 드디어 마지막 연구결과까지 완료해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논문심사 통과였다. 그러나 미국대학의 논문심사는 국내처럼 통과의례에 불과한 요식행위가 아니었다.

해당교실의 교수가 전원 모여 논문에 대해 문구 하나하나까지 따지고 덤벼든다. 조금이라도 미심쩍거나 불완전한 부분이 있으면 논문통과가 보류되고, 이를 보완한 뒤 다시 심사를 받아야했다.

골칫거리는 논문심사 날짜를 선정하는 일이었다. 5명의 미생물학 교수들이 모두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짜를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 가까스로 잡은 날짜가 1959년 12월13일이었다. 희한하게도 그렇게 바쁜 교수들의 일정이 이날만은 약속이라도 한듯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심사 전날 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올 때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골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삐끗하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 기간을 다시 기다린다는 것은 올해 말까지 귀국하기로 한 학교 규정상 불가능했다.

심사 당일 심사에 앞서 인사차 찾은 지도교수 쉬러는 내게 힐난하듯 물었다. 닥터 리는 오늘 무슨 날인 줄 아느냐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른 나는 12월13일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교회는 다니는가며 묻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가 들려준 말에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택한 12월13일이 마침 금요일이었는데 이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13일의 금요일이란 것이다.

그나마 12월에 낀 13일의 금요일은 몇 년에 한번 올까말까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그냥 쉬는 최악의 흉일(凶日)이라는 것이 아닌가.

일부러 교수들을 골탕 먹이려고 흉일을 택한 건방진 놈으로 인식되면 큰일이다 싶었다. 아무리 논문을 잘 써도 교수들이 흠을 잡으려고 들면 어떤 학생이 이를 배겨낼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잘 버텨온 내가 여기서 드디어 무너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하니 아찔하기만 했다. 오전 10시 논문심사가 시작됐다.

수 십 개의 질문이 비오듯 쏟아졌다.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그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내 논문의 통과가 확정된 것이 아닌가.

심사 후 심사장을 떠나는 한 교수가 내 어깨를 툭 치며 '13일의 금요일' 하며 씩 웃고 나갔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오히려 나의 문화적 무지가 그들에게 큰 결례였지만 한편으론 순수하게 어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새옹지마의 진리가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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