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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칼럼] ASEM의 두 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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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6면

철부지(哲不知) 로고의 티셔츠를 입은 학생들이 특별히 모실(?) 데가 있다기에 어정어정 따라간 곳이 교정에 차린 주유소(酒有所)였다.

연전의 어느 대학 축제에서 철학과 학생들과 어울린 철부지 향연을 나는 아직도 유쾌한 기억으로 간직한다. 철부지의 철학, 그 반어적 익살이 재미있지 않은가.

25개국 정상이 참석하는 제3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가 오늘 서울에서 개막된다. 세계의 진로를 좌우하는 강대국 원수로는 유일하게 미국 대통령이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이 빠진다는 이유로 동아시아경제회의(EAEC) 창설조차 집요하게 반대하던 터에, 그 동아시아 국가들과 유럽연합(EU)이 한데 모였으니 아셈을 바라보는 미국의 심사가 썩 편치는 않을 터이다.

카터 행정부에서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교수는 그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 (삼인, 2000)에서 미국이 현재의 세계적 패권(global supremacy)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유라시아 대륙의 향배를 경계하라고 주장했는데, 바로 그 유라시아 국가들이 회동한 것이다.

아셈 회의장 내의 체스 경기야 정상들의 몫이다. 나의 관심은 차라리 장외에서 벌어질 '거리의 행사'에 있다. 국내외 2백20여 민중 단체와 시민 단체가 3만명 규모의 '서울 행동의 날' 시위를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집회를 봉쇄하고 요인을 경호하기 위해 경찰 역시 4만여 병력으로 사상 최대의 작전을 펼칠 예정이다. 근엄한 정상들의 눈에 거리의 행사는 기껏해야 철부지들의 축제로 비칠지 모른다. 철학도한테 특별히 빌린(!) 이 철부지 호칭을 과히 섭섭히 여기지 말기 바란다.

시애틀-프라하-서울로 이어지는 세계화 반대 시위는 솔직히 그 철부지 객기와 혈기가 아니고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노벨상에 빛나는 이 평화로운 나라에 노숙과 물감 세례를 마다 않고 몰려오겠는가? 그것도 제 돈을 들여서!

세계 28억의 인구가 하루 2달러 이하의 소득으로 살아간다. 1달러로 버티는 사람도 12억이니, 지구 인구의 5분의 1이 이 돈으로 먹고 입고 자는 것은 물론 병을 고치고 교육까지 받아야 한다.

반면 세계의 최고 갑부 3인의 재산이 43개 최빈국의 국내총생산을 웃돌고, 2백대 부자의 재산은 빈민 24억의 소득보다 많다. 이 참담한 모순이 물론 세계화만의 책임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화가 '결과적으로' 그런 불평등을 부추기고, 그 격차 해소에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세계화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10년 전에 비해 실제로 소득이 줄어든 나라가 무려 80개국이므로 세계화는 곧 '빈곤의 세계화'였던 셈이다.

시위대가 겨냥하는 것은 실러의 시구와 베토벤의 선율이 어우러진 합창교향곡처럼 "모든 사람이 형제가 되자"는 그런 세계화가 아니다. 오히려 초국적 금융자본이 개도국 경제를 거덜내고, 경쟁력 향상과 구조 조정의 명분으로 근로자를 내쫓는 세계화, 요컨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막가파' 세계화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번 아셈의 의제는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세계화도 아니다. 그러나 거기 모인 정상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그 결과에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들이다.

적어도 철부지 시위대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될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한낱 희망 사항이라면….

지난해 시애틀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 당시 기자를 회담 대표로 오인한 주최측의 실수로 우연히 밀폐된 회의장에 들어간 '가디언/옵서버' 특파원은 기막힌 기사 하나를 송고했다.

화염병이 날고 최루 가스 자욱한 거리의 소란과는 전혀 딴판으로, 많은 대표들이 졸고 있었고 "생명의 유일한 신호는 장관이 그의 여성 보좌관과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듯한 어느 라틴 아메리카 대표단이었다. 멀리서 풍선검을 부는 사람도 있었다. 저개발국 대표들은 열심히 그들의 단골 메뉴를 내놓았지만, 그 격차가 너무 커서 도저히 메워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셈 정상 누구도 풍선검을 불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다만 세계화가 거스르기 힘든 현실이라면, 거기 맞서는 거리의 행사도 이제 '현실'이 되었다. 회의장 안팎의 이 안타까운 현실 격돌에도 불구하고 나는 건국 이후 최대의 국제 행사라는 서울 아셈에 한점 얼룩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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