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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 재일 조선인 지휘자 김홍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나는 재일 조선인 지휘자 김홍재를 알지 못했다. 그를 잠깐 만나보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떨어지는 오동 한 잎을 보고도 천하에 가을이 깊었음을 안다 했으니, 그와의 대화가 짧았을망정 꽤 진지했으므로 그를 아는 척할 만한 구실은 생긴 것 같다.

김홍재는 지난 13일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오는 20일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전야제 축하 공연을 지휘하기 위해서다.

그는 일본의 지휘계에서 오자와 세이지(小澤征爾)의 차세대를 이끄는 선두주자다. 일본 매스컴은 그의 연주회 소식을 빠짐없이 보도하고, 일본 곳곳마다 그의 팬클럽이 결성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그의 존재가 무명에 가깝다. 그의 내한은 금기였고 그에 관한 소식조차 일종의 관심 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적(朝鮮籍)인데다 1990년 평양범민족대회에서 평양교향악단을 지휘한 기피인물이었다. 한.일 수교 전 재일동포들은 그냥 '조선적' 이었다.

수교 후 그들은 대한민국 국적으로 전환하거나, 일본에 귀화하거나, 조선적으로 남는 세 갈래 길에 섰다. 김홍재 집안은 조선적을 유지했고 그 선택은 자연히 북한 국적으로 괄호쳐졌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일본 내 무국적자였고 그 때문에 남다른 고통의 길을 걸어야 했다. 조선민족학교 출신은 국립대에 입학할 수 없다는 제약으로 그는 찢어지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사립대 도호음대에 그것도 대학측의 배려로 입학했다.

또 유학을 가려 해도, 해외연주를 하려 해도 '무국적' 의 신세이기 때문에 출국을 원천봉쇄당했다. 어찌어찌해서 재독 윤이상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천우신조였다.

그런 역경을 뚫고 그는 23세 때 도쿄국제콩쿠르에서 처음 제정된 사이토 히데오상을 수상했고 일본 유수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됐으며 1998년 일본 최고의 지휘자에게 수여하는 와타나베 아키오상을 거머쥐어 일본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ASEM 무대에서 윤이상의 곡을 그의 지휘로 KBS교향악단이 연주하며,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협연하는 광경은 그 자체로 우리 민족이 화합하는 음악적 상징이 될 것이다.

- 조선적 재일동포로서 서울에 못 오다가 ASEM이라는 역사적 행사의 축하 공연을 지휘하게 됐다. 개인적으로 이 지휘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나.

"ASEM을 축하한다는 의미도 크지만 내가 이 무대에 서는 것은 민족화합을 촉진하는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본다. 지난 몇 해 동안 한국의 교향악단과 호흡을 맞춰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희망이 빨리 이뤄져 기쁘다. 마침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노벨 평화상까지 받아 더욱 영광스럽다."

- 金선생의 오늘은 각고의 노력에 의한 승리의 드라마라고 표현할 만하다. 역경을 이겨내는 낙관적 용기 또는 배짱의 원천은 무엇인가.

"내가 일본에서 일본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지금의 나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일본사회를 헤쳐나가는 부모의 처지를 보고 내 마음이 꺾이기보다 오히려 뭔가 하고 말겠다는 뱃심이 생겼다. 부모가 어떤 역경에도 지지 않도록 키웠다. 또 같이 사는 재일동포들의 모습을 보고도 같은 마음을 다졌다. "

- 음악활동을 예로 들면 어떤 노력이 있었나.

"나는 조선민족학교에서 음악에 입문했지만 전문음악교육은 대학에서 처음 접했다. 입학은 했지만 실력은 꼴찌였다.

다른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전문레슨을 받았다. 나는 1~2년 안에 그들을 따라잡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들을 앞서 나가리라고 작정했다.

매일 새벽에 수위를 깨워 연습실로 들어가 밤까지 공부했다. 그 결과 2년 후에 내가 제일 우수한 학생으로 선발됐다. "

- 운동선수의 헝그리 정신과 비슷하다.

"어릴 때 늘 식은 밥으로 생활했다. 한 방에서 다섯 식구가 같이 잤다. 촌에서 도쿄로 유학왔다. 피아노는커녕 싸구려 오디오 기기 하나 없는 방에서 대학 생활을 아르바이트로 버텼다.

돈이 좀 생기면 음악자료를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음악다방에 들어가 연주를 듣고 악보와 비교하며 공부했다. 음악다방의 디스크가 큰 스승이었다. "

- 아르바이트는 어떻게 했나.

"공사장에서 막노동도 하고 불고기집에서 설거지도 했다. 또 동포집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출근길 전차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면 사람들 등을 뒤에서 밀어 태우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

- 고생 끝에 대학 졸업 연주회에서 대표로 지휘봉을 잡았을 때 소감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

- 일본의 국립음대가 조선적에게는 입학할 자격을 안주는데도 조선적을 고집한 입장은 뭔가.

"부모가 조선적이었다. 어릴 때는 조선적의 의미를 몰랐지만 커가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부모는 조선족민족학교 교원이었다. 부모님은 조선반도는 하나이고 민족도 하나라고 교육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어느 쪽이 아니고 오직 조선사람이다."

- 최근의 남북화해 분위기가 남다르게 느껴지겠다.

"남북 정상회담을 보고 감격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민단 쪽의 바이올리니스트 정찬우씨와 함께 유니티(통일)콘서트를 열었다. 남북 정상이 만나는 걸 보고 이렇게 간단한 걸 왜 그렇게 시간이 걸렸나 하는 생각과 함께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 올랐었다. "

- 연주회가 끝나면 거의 탈진 상태에 빠진다는데 자기 관리는 어떻게 하나.

"연주회를 한 번 하려면 준비기간이 길다. 나는 청중에게 감동을 주는 데 모든 정신을 기울인다. 지휘는 정신노동이기도 하고 육체노동이기도 하다.

한 번 연주회가 끝나면 몸무게가 1.5㎏쯤 빠진다. 연주회가 잇따라 있기 때문에 음악외에는 아무 것도 못한다. 93세의 대선배에게 지휘자에게 제일 중요한 게 뭐냐고 물었더니 체력이라고 했다. "

- 일본 필을 처음 지휘할 때 첫 곡과 마지막 곡을 조선관현악으로 한 것은 자신이 조선적임을 과시한 것일 수도 있고 더 중요한 건 자신의 음악의 뿌리가 민족정서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느껴진다.

"나는 유럽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전공했다. 그러나 내가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은 우리의 민족악기다. 피리나 대금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부터 그 소리가 자연스럽게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그 소리를 서양악기로 오케스트라화하는 건 나에겐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사회의 동포예술가로 지휘자는 내가 처음이었다. 한국의 전통이 스며 있는 한국음악의 우월성을 일본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 선택했다. "

- 윤이상 선생을 사사했는데 윤이상 음악의 맥은 무엇인가.

"윤이상 선생의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 한국.중국을 근거로 한 동아시아의 전통 정서와 음악을 유럽의 오케스트라를 통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해서 깜짝 놀라고 감격했다.

윤이상 선생처럼 나도 재능이 있으면 곡을 만들겠는데 그렇지 않아 선생님의 곡을 열심히 소개하고 있다. 윤이상 선생은 유럽에서 아시아의 민속악기를 사용하지 않고 유럽사람들에게 아시아의 우주관.생명관을 설득했다. 선생님은 진정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

- 윤이상은 전력(동백림간첩단 사건 연루)문제로 끝내 고향인 통영 앞바다를 보지 못하고 이국에서 별세했다. 심정이 어떻든가.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 일본에서 만났는데 '자네가 나의 뜻을 이어 한국의 음악을 잘 알리라' 고 당부했다.

또 한국에도 당신의 작품을 많이 소개해 달라고 말했다. 배울 게 더 많았는데 가슴이 아프다. 선생님은 순수한 예술가의 마음으로 남북을 바라봤다. 예술가의 마음을 정치적 눈으로 보면 안된다. "

- ASEM 무대에 오르는 윤이상의 '무악' 은 어떤 곡인가.

"20세기 유럽의 발레와 우리의 궁중무인 '춘앵무' 를 대비한 곡으로 동서양의 구분을 뛰어넘는 인류의 정신을 표현했다. ASEM의 성격에 잘 맞을 것 같아 선택했다. "

- 이제 서울 무대도 밟게 됐으니 앞으로 재일동포 음악인들을 포함해 남북한 음악인들이 함께 모여 순회 연주도 하면 보기 좋을텐데 그런 구상은 갖고 있나.

"안그래도 '원 코리아(One Korea)오케스트라' 라는 이름으로 남북한 음악인들이 함께 하는 악단을 만들어 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정이 허락하면 판문점 같은 데서 연주하면 얼마나 좋겠나. "

- 일본 애니메이션의 유명한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꼭 자신의 영화음악 지휘를 金선생에게 맡기는 걸로 알고 있다. 영화음악은 클래식을 대중화하기 위함인가.

"클래식 오케스트라 음악은 어렵다고만 생각하는데 알고 보면 신나고 재미 있는 구석이 많다. 클래식을 친근하게 하기에는 영화음악이 참 좋다. 영화음악 디스크인 '모노노키' 는 40만장이나 팔렸다. 클래식을 연주장 안에 가둬 놓으면 안된다. "

- 농담이지만 태권도를 배우면 어떻겠나. 지휘하면서 팔을 열정적으로 휘두를 때 절도 있는 강약의 폼이 더 살아날텐데.

"지휘는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멋있게 보이려고 힘을 주면 연주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따라서 힘을 주게 된다. "

- 좌우명 같은 게 있으면 소개해 달라.

"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한다' 인데 막 인상쓰며 달려드는 태도는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은 성실하게 노력을 다한다는 뜻이다. "

그는 음악이란 인간만이 가진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이기에 누구든 "나는 음악 없이도 살 수 있다" 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건우와의 협연 등 이번 ASEM 연주회가 자신의 단독 무대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늘 앙코르곡으로 애용하는 '아리랑' 을 연주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22일 출국한다.

이헌익 스포츠.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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