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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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2. 미생물학 조교시절

41년 서울대의대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기교수는 기이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졸업후 대구동산병원에서 소아과의사를 하다 일본군이 운영하던 만주 대련소재 만주철도주식회사 위생연구소로 직장을 옮겼기 때문이다.

이곳은 말이 위생연구소지 실제 세균전 연구로 악명높은 일본 731부대의 분소나 다름없었다. 기교수는 이곳에서 발진티푸스 연구에 매달렸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자신의 연구가 세균전을 위한 기초연구로 활용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유일하게 한국인 의사이기도 한 그에게 기밀누설 등 감시의 눈초리가 심해짐을 느꼈다고 한다.

다행히 44년 일제 패망 직전 그를 좋게 본 일본인 분소장이 한국으로 내보내 세균전의 전범으로 몰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지금의 서울 삼청동 공무원교육원 자리에 위치한 방역연구소 소장으로 일하다 1949년 경성제대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가 서울대의대로 통합하면서 미생물학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전염병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천연두는 물론 재귀열.발진티푸스.말라리아 등 각종 세균질환으로 병원마다 환자들이 들끓었다.

나는 원래 환자를 진료하는 내과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먼저 미생물학을 공부해야 훌륭한 내과의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53년 서울 동숭동으로 캠퍼스를 옮긴뒤 그해 12월 졸업하자마자 6개월간의 군의관훈련을 마치고 기용숙교수가 있는 미생물학교실의 조교로 자리를 옮겼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기억에 남을 학창시절의 추억이나 로맨스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아마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땐 다같이 못살고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것이 문제였다. 나도 육군6사단에서 헌병대위를 하던 형님이 학비를 대 주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지만 매일 점심을 굶어야했을 정도로 궁핍했다.

조교시절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세균이 자랄 수 있는 배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쇠고기를 끓여 우려낸 국물에 한천을 섞어 만든다.

중요한 것은 다른 잡균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멸균해야 하는 것이었다. 기교수는 항상 저녁 6시쯤 실험실로 나타나 조교들에게 내일 아침까지 배지를 만들라고 지시하곤 했다.

그러니까 기교수가 나타나는 날이면 그날 실험실에서 꼬박 밤을 지새워야한다는 의미다. 요즘처럼 미리 만들어진 좋은 배지가 없던 시절이므로 우리는 미군이 쓰다남은 야전용 멸균장비로 직접 만들어야했다.

마치 대장간의 풀무처럼 생긴 장비로 바람개비를 돌려가며 쇠고기 국물과 한천 혼합물에 121도의 온도와 15파운드의 압력으로 15분을 정확하게 가해야 비로소 완전하게 멸균이 되었다.

나는 원칙주의자였으므로 밤새도록 그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선배조교였던 정모씨는 그날밤 데이트를 하느라 적당히 하고 일찍 퇴근했다.

다음날 아침 기교수가 나타나 플라스크에 담긴 배지를 내놓으라고 말했다. 내 것은 맑고 투명한 배지였다.

그러나 정선배의 것은 잡균 감염으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기교수는 정선배에게 규칙대로 멸균을 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정조교는 엉겁결에 제대로 했으나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고 둘러댔다.

기교수는 같은 자리에서 세번을 반복해서 물어봤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이니 만큼 정선배도 물러설 수 없어 여러가지 핑계를 댔다. 결국 기교수의 불벼락이 떨어졌다.

"연구하는 학자의 생명은 정직인데 끝까지 나를 속이려드니 용서할 수 없다" 는 것이었다. 결국 정조교는 배겨나지 못하고 미생물학 의국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지금도 논문 등 학자의 연구결과에 대해 조작 등 시비가 많다.

그러나 거짓은 언제고 탄로날 일이다. 학문의 길을 시작한 나에게 유난히 정직을 강조하던 기교수의 꼬장꼬장함은 두고두고 큰 교훈이 되었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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