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PD수첩의 ‘아바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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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런데 인터넷 게임이나 세컨드 라이프 같은 가상공간이 아닌 현실세계에서도 아바타는 사실상 활동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 개 이상의 아바타, 즉 분신(分身)을 갖고 있다. 심리학에 이미 페르소나(persona·외적 인격) 같은 개념이 있으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우리는 필요할 경우 적당한 아바타를 골라 내보내 외부상황에 대처하게 만든다. 자동차 접촉사고를 내고도 잘했다고 박박 우기는 상대와 시비가 벌어지면 내 속에서 가장 위압적이고 독한 아바타를 골라 대항하게 한다. 사랑하는 남자의 전화를 받은 여인 내부에서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지닌 아바타가 출동한다.

그제 MBC PD수첩 ‘광우병’편 제작진 5명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내게는 대단히 민망하고 한편으로 겸연쩍기도 한 일이었다. 이날 1심 판결은 같은 언론계 종사자로서 환영할 만한 구석이 분명히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저 ‘환영할 만한 구석’ 정도가 아니라 전 언론계가 나서서 기뻐하며 춤을 추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문성관 판사가 언론의 정부정책 감시 기능과 보도의 자유를 황송하리만치 실팍하게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언론 보도의 내용이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지 여부는(중략) …그 보도가 독자에게 주는 전체적인 인상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인이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를 섭취할 경우 인간광우병이 발병할 확률이 약 94%가량 된다는 내용이 들어있기는 하나, 이는 전·후 문맥에 비추어 과장되거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보이므로, 이 부분 보도 내용은 중요한 부분에 있어 객관적인 사실과 합치되어 허위라 볼 수 없다’…. 어떤가. 언론인 입장에서는 정말 고맙고 고마운 판사님 아닌가.

이념의 탈을 쓴 아바타들이 사회 곳곳에서 전성기를 누리는 마당에 이번 판결에까지 지청구를 하기에는 지면이 아깝다. 내가 정작 궁금한 것은 PD수첩 제작진의 ‘캡슐 속’이다. 제작진은 광우병 사태 내내 정당성을 주장했다.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다른 세력들과 힘을 합쳐 ‘언론·표현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아바타에 자신들의 신경계를 연결했다. 격렬한 아바타 전투 끝에 1차전에서 일단 승리를 따냈다. 감개무량할 것이다. 조능희 전 CP(책임프로듀서)는 판결 후 “무수한 탄압과 고통을 겪어 왔던 제작진에게 고맙고 미안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아직 ‘아바타 상태’에서 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그들의 캡슐 속 속마음이 궁금한 것이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를 떠나 언론인에게는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정확한 사실 보도다. 잘못이나 실수를 범하면 솔직히 바로잡는 용기다. PD수첩의 광우병 보도는 초보 언론인의 눈으로 보아도 허점과 오류투성이였다. 제아무리 선의(善意)라 해도 팩트와는 별개다. 정치적 편향성은 말할 것도 없다. 설사 “적개심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해도 원칙까지 무시해선 안 된다. 그래서 무죄 판결에 다른 이들은 춤추더라도, 당사자들만큼은 부정확한 보도와 엄청난 부작용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반성했어야 했다. 그게 쑥스럽다면 전투 모드 아바타를 떠난 자기만의 캡슐 속에서라도. 그러나 털끝만큼도 그런 기색이 없으니 공연히 나까지 민망하고 겸연쩍어지는 것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