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맹서 애증까지:고수석의 북·중 돋보기] ② 김정일과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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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정일과 중국
중국 지도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마오쩌둥(1893~1976)은 김정일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덩샤오핑(1904~1997)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덩샤오핑의 외교정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도광양회(韜光養晦)였죠.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는 뜻입니다. 덩샤오핑은 1980년대에 미·소 냉전은 지속되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다보고 경제개발에 집중하지요.

덩샤오핑이 도광양회를 내세우면서 심혈을 기울인 것은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독립자주 외교를 통해 미국과 소련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경제현대화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이데올로기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었지요. 셋째는 중국 국경 주변의 정세가 안정되도록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가지는 모두 4개 현대화(국방, 과학기술, 농업, 공업)와 연결돼 있었지요.

이 가운데 김정일과 관련된 사항은 세 번째이지요. 오늘은 이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중국과 국경을 접한 나라는 러시아·몽골·아프가니스탄·베트남·북한 등 모두 14개국입니다. 그 가운데 동맹을 맺은 유일한 나라는 북한이지요. 북한은 한국과 정전(停電)상태이고, 한국에는 미군이 주둔하기 때문에 덩샤오핑의 입장에서는 다른 국경보다 관심을 더 가졌지요. 만약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 그가 이루고자 한 중국의 경제현대화는 물거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덩샤오핑에게 김정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김정일이 1983년 6월 2일~12일 중국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김정일이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김일성의 후계자 지위를 부여 받은 이후 첫 해외 활동이었지요. 중국도 북한 후계자에 대해 각별한 예우를 다했지요. 그것은 그가 만난 중국 지도부의 면면들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덩샤오핑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후야오방 총서기, 자오쯔양 총리, 리셴녠 정치국 상무위원, 덩잉차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등 당시 중국 최고 지도층이었지요.
김정일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연형묵 노동당 비서, 현준극 전 주중대사 등 그의 최측근을 데리고 갔지요. 덩샤오핑은 김정일에게 개혁·개방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을 들려주었습니다. 79살의 덩샤오핑은 41살의 김정일에게 무슨 일을 개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며, 정책을 추진할 때에도 늘 쉬지 않고 조정하고 검토해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달했지요. 그리고 중국 농촌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했지요. 덩샤오핑은 자신의 설명을 듣고 김정일이 개혁·개방에 관심을 갖기를 바랬지요. 그것은 중국 국경의 안정화와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덩샤오핑의 기대와 달리 김정일이 던진 질문은 “만약 조선에 전쟁이 나면 중국이 지원해 줄 수 있는가?”였습니다. 덩샤오핑은 약간 놀라면서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라고 대답했지요. 덩샤오핑은 김정일이 방중 기간에 중국의 개혁·개방 현장을 보았기 때문에 호전적인 질문보다는 북한 경제와 관련된 질문을 하리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덩샤오핑과의 면담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간 김정일은 “이제 중국 공산당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존재하는 것은 수정주의 뿐이다. 그리고 중국의 지도자들은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지요. 이 말은 전해 들은 덩샤오핑은 기가 찰 노릇이었지요.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로 인해 중국의 운명이 위협받는 사태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텐데”라고 개탄했지요.
결국 이 일은 김일성이 수습해 표면적으로 가라앉았지만 중국 지도부는 김정일을 주의 깊게 보게 되고, 김정일 역시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지요.
이런 중국의 우려는 몇 달 뒤에 현실화되지요. 버마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1983년 10월 버마 아웅산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과 그 각료들에 대한 테러였지요. 아웅산 테러는 한국이 중국·소련과 관계정상화를 추진하자, 김정일이 이를 북한의 생존권에 대한 직접적인 위험이라고 판단해 한국에 강력한 경고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졌지요.
이 사건은 중국을 경악시켰지요. 무엇보다 국경 주변의 안정화를 중시해 온 중국에게 북한이 얼마나 파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였지요. 중국 지도자는 국가원수를 상대로 테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중국은 이 사건이 몇 달 전 ‘대를 이은 우호’를 강조했던 김정일이 지시했다는 점과 중국에 전혀 ‘귀뜸’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망이 더 컸지요.
아들이 저지른 잘못을 아버지가 수습할 수 밖에 없었지요. 김일성은 이 사건을 실무 책임자인 대남비서 김중린을 퇴진시키고, 그 자리에 외교부장인 허담을 앉혔지요. 허담은 김일성의 외사촌 매부(김일성 고모의 사위)로 1970년부터 북한의 외교를 이끌어 오면서 북한 외교의 틀을 잡은 인물이지요. 그리고 외교부장에는 김영남(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임명하지요.
아웅산 테러 이후 덩샤오핑은 김정일은 만나지 않습니다. 덩샤오핑은 1997년 사망하기 전까지 김일성만 세 차례 만나지요. 김정일은 덩샤오핑이 사망한 뒤 2000년 5월 베이징을 방문해 덩샤오핑의 뒤를 이은 장쩌민 국가주석을 만나지요.
다음은 ‘장쩌민과 김정일’ 편이 이어집니다.

☞고수석 기자는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를 거쳐 통일문화연구소에서 북한 관련 취재를 했다. 중앙일보 전략기획실 차장. 고려대에서 ‘북한· 중국 동맹의 변천과정과 위기의 동학’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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